금융소비자들이 은행을 신뢰하는 이유가 뭘까. 중소형 금융회사는 물론이고 대형 은행도 퇴출될 수 있다는 것을 외환위기 때 경험했지만, 나의 예·적금이나 보험금이 떼일 것이라는 걱정은 뒷전이다. 정부가 뒤에 있다는 믿음에서다. 법으로 보면 예금보험법이 있고, 제도로는 정부 산하 공기관인 예금보험공사가 이 업무를 맡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예금보호 한도는 금융회사별로 최대 5000만원이다. 금액뿐 아니라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는 금융상품도 많다. 늘어난 예금 자산, 커진 경제 규모에 맞춰 예금보험 한도를 높이려는 움직임이 정부에 있다. 금융회사가 도산해도 보장받는 예금 한도를 높이려면 예금보험료를 올려야 한다. 이용자와 소규모 금융회사의 도덕적 해이도 우려된다. 국제적으로 낮은 예금보호 한도, 늘려야 할까. [찬성] 예금 자산 5배 소득 2배 이상 늘어…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도 매우 낮아무엇보다 예금보호 한도가 ‘일괄 5000만원’으로 정해진 지 20년도 더 됐다. 그사이 등락은 있었지만 한국 경제는 크게 성장했다. 이 기간 늘어난 예금 자산이 다섯 배나 된다. 예금보험공사와 한국은행에 따르면 예금자 보호를 받는 부보예금은 2001년 550조2000억원에서 2020년 2534조4000억원으로 늘어났다. 그 이후에도 더 늘어나 있을 것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봐도 이 기간 1493만원에서 3440만원으로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경제 규모나 돈의 단위가 늘어난 것이다. 5000만원으로 예금보호 한도를 정했을 당시의 5000만원과 지금의 5000만원은 이런 통계치 이상의 가치 차이가 난다. 이것만으로도 예금보호 한도를 높여야 하는 이유가 된다.
1인당 GDP를 기준으로 국제 비교를 해보면 국내 한도는 1.3배로 매우 낮다. 예금자 1인당 보호 한도가 중국의 경우 50만위안으로 1인당 GDP의 6.8배에 달한다. 호주(25만호주달러)는 이 비율이 3.2배, 미국(25만달러)은 3.7배, 일본(1000만엔)도 2.2배다. 국제 비교를 해도 커진 경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형 은행과 소규모 저축은행, 보험회사, 증권사 등 대부분 금융회사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문제다.
코로나 위기가 끝나면서 물가가 치솟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미래의 걱정거리가 아니라 이미 현실화됐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다시 흔들리면서 경제·금융위기 도래 경고가 계속 이어진다. 금융위기에 뱅크런(bank run: 예금 지급 불능 사태를 우려한 은행 고객들의 무차별 예금 인출)이라도 빚어지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적어도 1억원 정도로 올려야 할 시기가 됐다. 문제점만 보면서 당장 골치 아프다고 지금 해야 할 결정을 미루면 문제점을 키우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반대] 금융사·소비자 '도덕적 해이' 우려…예금보험료 인상도 불가피한국의 많은 예금자가 ‘비 올 때 우산을 빼앗지 말라’고 한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의 본질 기능이 리스크 관리인데, 부실 개연성이 있는 대출을 관리하면 ‘악덕 금융’으로 매도하는 사례가 많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중소기업과 사업자의 대출금을 어떻게 냉정하게 회수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예금을 되돌려받지 않아도 좋으냐”고 물으면 모두 펄쩍 뛴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예금은 돌려받아야 하고, 대출금은 자선사업가처럼 관대하게 관리하는 것은 함께 갈 수 없다. 금융회사는 예금이나 보험료를 받아 대출 등으로 운용하는 금융 중개 회사일 뿐이다. 매우 단순한 비즈니스다. 금융 지식이 부족한 것인지, ‘선행 컴플렉스’인지 모를 일이다.
예금보호도 그렇다. 예금보호 대상을 5000만원에서 더 올리면 예금보험료가 오를 수밖에 없다. 예금자는 이자에서 떼는 게 늘 것이고, 대출자는 이자에 붙는 게 많아질 수 있다. 당장은 금융회사 부담이 커지겠지만 결국 금융소비자에게 보험료 부담이 전가될 텐데, 한국 금융소비자들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나.
예금보험공사를 내세운 정부의 지급보증은 저축은행·상호금융 등 소규모 금융회사로 하여금 ‘고위험 돈장사’에 나서도록 부채질할 개연성도 있다. 금융회사의 본업인 위험 관리는 소홀히 될 수 있다. 이런 ‘도덕적 해이’ 문제는 예금자에게도 해당된다. 작은 금융회사가 위험한 돈놀이(대출 영업)를 해도 0.1%포인트의 이자만 더 주면 부실한 금융회사로 달려가 예금보호 한도껏 맡길 것이다. 엉터리 금융회사가 망해도 예금을 다 돌려받을 수 있으니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보호 한도를 지금처럼 똑같은 수준으로 일괄 올리면 예금자는 금융사의 건전성보다 고금리만 좇고, 금융회사의 운용책임도 떨어진다. 이런 도덕적 해이를 정부가 조장해선 곤란하다. √ 생각하기 - 금융 영역·상품별 차별화도 대안…손 볼 '5000만원 기준' 많아경제 변화에 따라 제도가 유연하게 따라가는 게 중요하다. 몸집이 커지면 옷도 커져야 하는 것과 같다. 당장 골치 아프다고 미뤄봤자 문제를 키울 수 있다. 일괄적 예금보호 한도 올리기가 어렵다면 금융 영역별로, 예금 상품별로 한도를 차별화·세분화하는 것도 대안이다. 시기적으로 나눠 갈 수도 있다.
보호 한도를 올릴 때 예상되는 부작용은 금융감독 정책에서 운용의 묘로 최소화할 수 있다. 금융감독원 감독·검사에서 더 치밀해지는 것이다. 차제에 정부는 커진 경제 규모를 반영해 다른 ‘5000만원 한도 기준’까지 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게 8년째 그대로인 증여세 면세 기준이다. 증여·상속세 문제가 중산층에도 큰 관심사가 된 현실을 정책에 반영하는 게 된다. 이 기준을 올리면 소비 활성화에 도움 되고, 저출산 해결에도 일조할 수 있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1인당 GDP를 기준으로 국제 비교를 해보면 국내 한도는 1.3배로 매우 낮다. 예금자 1인당 보호 한도가 중국의 경우 50만위안으로 1인당 GDP의 6.8배에 달한다. 호주(25만호주달러)는 이 비율이 3.2배, 미국(25만달러)은 3.7배, 일본(1000만엔)도 2.2배다. 국제 비교를 해도 커진 경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형 은행과 소규모 저축은행, 보험회사, 증권사 등 대부분 금융회사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문제다.
코로나 위기가 끝나면서 물가가 치솟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미래의 걱정거리가 아니라 이미 현실화됐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다시 흔들리면서 경제·금융위기 도래 경고가 계속 이어진다. 금융위기에 뱅크런(bank run: 예금 지급 불능 사태를 우려한 은행 고객들의 무차별 예금 인출)이라도 빚어지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적어도 1억원 정도로 올려야 할 시기가 됐다. 문제점만 보면서 당장 골치 아프다고 지금 해야 할 결정을 미루면 문제점을 키우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반대] 금융사·소비자 '도덕적 해이' 우려…예금보험료 인상도 불가피한국의 많은 예금자가 ‘비 올 때 우산을 빼앗지 말라’고 한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의 본질 기능이 리스크 관리인데, 부실 개연성이 있는 대출을 관리하면 ‘악덕 금융’으로 매도하는 사례가 많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중소기업과 사업자의 대출금을 어떻게 냉정하게 회수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예금을 되돌려받지 않아도 좋으냐”고 물으면 모두 펄쩍 뛴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예금은 돌려받아야 하고, 대출금은 자선사업가처럼 관대하게 관리하는 것은 함께 갈 수 없다. 금융회사는 예금이나 보험료를 받아 대출 등으로 운용하는 금융 중개 회사일 뿐이다. 매우 단순한 비즈니스다. 금융 지식이 부족한 것인지, ‘선행 컴플렉스’인지 모를 일이다.
예금보호도 그렇다. 예금보호 대상을 5000만원에서 더 올리면 예금보험료가 오를 수밖에 없다. 예금자는 이자에서 떼는 게 늘 것이고, 대출자는 이자에 붙는 게 많아질 수 있다. 당장은 금융회사 부담이 커지겠지만 결국 금융소비자에게 보험료 부담이 전가될 텐데, 한국 금융소비자들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나.
예금보험공사를 내세운 정부의 지급보증은 저축은행·상호금융 등 소규모 금융회사로 하여금 ‘고위험 돈장사’에 나서도록 부채질할 개연성도 있다. 금융회사의 본업인 위험 관리는 소홀히 될 수 있다. 이런 ‘도덕적 해이’ 문제는 예금자에게도 해당된다. 작은 금융회사가 위험한 돈놀이(대출 영업)를 해도 0.1%포인트의 이자만 더 주면 부실한 금융회사로 달려가 예금보호 한도껏 맡길 것이다. 엉터리 금융회사가 망해도 예금을 다 돌려받을 수 있으니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보호 한도를 지금처럼 똑같은 수준으로 일괄 올리면 예금자는 금융사의 건전성보다 고금리만 좇고, 금융회사의 운용책임도 떨어진다. 이런 도덕적 해이를 정부가 조장해선 곤란하다. √ 생각하기 - 금융 영역·상품별 차별화도 대안…손 볼 '5000만원 기준' 많아경제 변화에 따라 제도가 유연하게 따라가는 게 중요하다. 몸집이 커지면 옷도 커져야 하는 것과 같다. 당장 골치 아프다고 미뤄봤자 문제를 키울 수 있다. 일괄적 예금보호 한도 올리기가 어렵다면 금융 영역별로, 예금 상품별로 한도를 차별화·세분화하는 것도 대안이다. 시기적으로 나눠 갈 수도 있다.
보호 한도를 올릴 때 예상되는 부작용은 금융감독 정책에서 운용의 묘로 최소화할 수 있다. 금융감독원 감독·검사에서 더 치밀해지는 것이다. 차제에 정부는 커진 경제 규모를 반영해 다른 ‘5000만원 한도 기준’까지 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게 8년째 그대로인 증여세 면세 기준이다. 증여·상속세 문제가 중산층에도 큰 관심사가 된 현실을 정책에 반영하는 게 된다. 이 기준을 올리면 소비 활성화에 도움 되고, 저출산 해결에도 일조할 수 있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