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6) 발해의 멸망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6) 발해의 멸망

발해는 신비한 나라다. 건국도 극적이었지만 붕괴도 전격적이었고, 멸망 원인과 시기도 불명확하다. 또 ‘발해’와 ‘발해인’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역사에 등장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으며, 승병(勝兵)이 수만 명이고, 사방 5000리에 달한 영토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는 평가를 받는 발해는 왜 채 한 달도 못 버티고 멸망했을까? 역사가 후손에게 줄 유산은 ‘자랑’이 아니라 ‘교훈’이며, 남 탓이 아니라 제 탓을 하는 자세다. 한 달도 못 버틴 228년의 역사

이런 대분열 시대는 모든 국가와 인물들에게 양날의 칼로 작용한다. 위기이며 성공의 기회이기도 하다. 국제질서의 변화를 간파한 야율아보기는 동몽골의 초원지대와 요서에서 거란족을 통일(916년)하고, 서남쪽으로 토욕혼 등을 공격한 후에 몽골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이효형, 《발해유민사 연구》) 하지만 중국 세력, 북쪽의 실위·돌궐 등 세력과는 갈등구조였고, 발해의 동족국가인 고려 존재도 불안했다. 그런데 요동지역은 팽창에 적합하고, 철·곡식·소금 등이 풍부한 경제지대였다. 그는 918년에 요양을 점령했고, 이어 요양성에 발해 포로를 배치했다. 발해는 즉시 반격을 가해서 백성을 구출했고, 918년에는 사신을 파견하는 등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요동 쟁탈전은 계속돼 924년에도 요의 공격을 두 차례나 받았으며, 결국 전면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넓은 영토와 다양한 종족, 관리 어려워발해는 내부에 근본적인 취약점이 있었다. 넓은 영토에 자연환경이 거칠고 종족들도 다양하므로 관리체제가 느슨했다. 유사시에는 분열현상이 표출됐는데, 흑수말갈이 독자적으로 행동한 것은 이를 방증한다. 또 임금의 잦은 교체로 정치에 혼란이 생겼고, 잦은 천도(5회·수도 이전)로 재정이 악화됐으며 지역감정은 커졌다. 멸망 전인 925년에 장군인 신덕과 부하 500명을 비롯한 예부경 등 고위관료들이 100호의 백성과 함께 고려로 투항했다. 심각한 권력 쟁탈전이 일어났고, 백성은 마음이 떠난 채로(因彼離心,《요사》) 나라의 위기를 방관했음을 알려준다. ‘백두산 화산 폭발설’도 멸망 원인으로 제기된다. 1995년에 일본 학자 마쓰다 히로시가 주장해 관심을 끌었는데, 백두산은 발해가 멸망한 후인 937년 무렵에 폭발했다. 하지만 잦은 예비 화산활동이 민심을 혼란스럽게 했을 가능성은 있다. √ 기억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