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경제 읽기
(12) 혁신과 저성장
디지털 기술 혁신에도
성장이 가속화되지 않는 것은
상품에서 서비스로
지출이 이전한 결과
세상의 성장은 끝난 듯 보인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무렵만 해도 경제성장은 자연법칙처럼 들렸다. 농업이 주요 산업이던 1800년대 후반에도 전기가 발명되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있었던 1900~1950년에도 미국의 경우 평균 2%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경제성장률은 1% 안팎으로 떨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이벤트 탓으로 돌리던 경제침체가 장기화되자 저성장을 ‘뉴노멀’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일반화되었다. 기술과 경제성장현실에서 저성장 시대를 체감하기 어렵다. 물질적인 수준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다. 2018년 1인당 실질 국내총생산(GDP)는 대략적으로 1950년의 3배, 1900년의 8배, 1870년의 15배 이상이다. 게다가 기술 발전도 그 어느 때보다 빠르다. 컴퓨팅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사물인터넷과 클라우드, 인공지능 기술 발달은 생산방식의 변화와 새로운 서비스 등장을 견인하고 있다.(12) 혁신과 저성장
디지털 기술 혁신에도
성장이 가속화되지 않는 것은
상품에서 서비스로
지출이 이전한 결과
하지만 기술은 경제성장에 직접적인 요인은 아니다. 많은 경우 디지털 시대에 기술 발전을 경제성장의 핵심으로 간주하지만, 사실 기술 발전과 경제성장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경제성장은 인적, 물적자본의 물리적 증가와 이것만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요인에 의해 이뤄진다. 그리고 이 요인을 생산성 증가라고 한다. 생산성은 무능한 관리자를 교체해도 높아질 수 있고, 필요한 부품을 적시에 공급하는 재고관리기법에 의해서도 개선된다. 상품이나 공정이 첨단 기술인지 여부와 생산성 그리고 경제성장은 무관하다는 의미다. 물론 기술은 경제성장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인공지능 기반의 스마트공장은 생산비용을 낮춰 생산성을 높인다. 배터리 기술 발전, 클라우드 기술 등 디지털로 전환하는 오늘날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기술의 변화와 생산성 증가는 별개의 개념이다. 이는 동시에 경제성장의 둔화가 창의성이나 기술이 퇴보해 발생하는 현상이 아님을 의미한다. 보몰의 비용질병디트리히 볼래스 휴스턴대 경제학과 교수는 오늘날 저성장의 요인으로 지출 구성이 상품에서 서비스로 이동하는 점을 지적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윌리엄 보몰의 ‘비용질병’이라는 개념을 차용한다. 보몰은 1967년 발표한 논문을 통해 노동이 어떤 경우에는 최종 생산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인 반면, 또 어떤 경우에는 노동 자체가 최종 생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소비자 입장에서 스마트폰 생산에 투입된 노동력은 부수적이지만, 병원을 찾은 소비자인 환자 입장에서 의사의 노동력은 핵심 요소다. 환자는 의사의 관심과 시간을 구매하는 셈이지만, 스마트폰은 다르다. 즉, 노동자가 생산에 사용하는 시간은 소비자에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따라서 기업은 비용절감을 위해 상품에 대한 수요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노동자 1인당 산출을 최대한 늘리거나 노동자 수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서비스는 다르다.
비용절감을 위해 웨이터 수를 절반으로 줄이면 레스토랑의 서비스 수준도 절반으로 떨어진다. 따라서 상품은 생산을 증가시키면 비용이 감소하지만, 서비스는 비용이 증가한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비용과 가격이 함께 움직이는 시장경제에서 서비스 가격이 상품보다 높게 된다. 보몰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서비스의 비용 질병’이라고 불렀다.
문제는 상품 수요는 소득에 민감하지 않은 반면 서비스 수요는 소득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이다. 일반인과 빌게이츠의 소득 차이는 수천, 수만 배 차이가 나지만 상품에 소비하는 돈은 그렇게 차이나지 않는다. 반면 여행이나 법률 서비스, 개인비서 등 서비스 지출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할 수 없이 차이가 난다. 상품은 생산성이 개선될수록 더 저렴해지므로 소비자는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것을 소비할 수 있어 풍요롭다고 느끼고, 상품 소비에서 아낀 만큼 더 많은 서비스를 구입한다. 즉, 생산성 증가가 큰 분야에서 낮은 분야로 소비가 이전하는 것이다. 이는 상품생산 분야에서 남는 노동력이 서비스 분야로 이전하는 결과를 낳는다. 즉, 생산성이 증가하는 분야에서 생산성이 정체된 산업으로 노동력이 이전하지만, 결과적으로 사회가 획득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양은 비슷하게 된다. 성공의 결과로서 저성장 디트리히 볼래스 교수는 그의 책 《성장의 종말》을 통해 저성장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즉, 상품에서 서비스로 전환하는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산성 높은 방식으로 상품 생산에 성공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다양한 혁신은 생산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생산효율의 상승으로 이어져 서비스로의 전환을 가속화할 것이다. 앞으로의 세상에서 경제성장률을 경제와 사회의 발전 혹은 웰빙의 핵심기준으로 삼기 어려울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느린 성장은 대규모 경제적 성공에 대한 최적 반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