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 대북 경제협력 어떻게
다음달 평양에서 열릴 제3차 남북한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철도와 도로, 산림복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남북이 공동 조사작업을 진행 중이다.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한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남북 경협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섣부르게 낙관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수차례 남북 경협이 북한의 도발로 결국 중단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반관반민(半官半民) 방식으로 개시
남북 경협은 우리 정부와 북한 정권 간 관치(官治)에다 현대그룹을 중심으로 한 민간 기업 교류가 결합한 전형적인 반관반민 형태로 시작했다. 논의 초기 단계부터 사회주의 경제 특유의 폐쇄성이 가장 큰 장애물로 등장했다.
남북 경협의 시발은 1988년 7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7·7 선언’ 발표다. 이 선언엔 남북 동포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이산가족 생사 확인 추진, 남북교역 문호개방, 비군사 물자에 대한 우방국의 북한 무역 용인, 남북 간 대결외교 종식, 북한의 대미·일 관계 개선 협조 등의 내용이 담겼다.
1992년 2월 남북 간 위탁가공 교역이 처음 시작됐다. 2년 뒤인 1994년 11월엔 1차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가 발표됐다. 하지만 1996년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으로 대북 지원과 투자가 모두 동결됐다. 1998년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1001마리를 끌고 전격 방북한 뒤 분위기가 급변했다. 그해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고, 2000년 개성공단이 착공됐다. 2004년 12월 개성공단에서 첫 제품이 생산됐다. 2005년엔 남북 연간 교역규모가 10억달러를 돌파했다. 北 도발 속에서 흔들리다 중단
순탄할 것만 같았던 남북 경협은 북한의 잇따른 도발에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금강산관광은 2008년 7월 관광객 박왕자 씨가 인민군의 총격으로 피살된 뒤 곧바로 중단됐다. 2010년 3월엔 천안함 피격사건, 그해 11월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5·24 조치를 발표, 북한과의 교역을 전면 차단했다. 인도적 대북지원도 정부와의 사전 합의 없이 할 수 없게 됐다.
개성공단의 경우 북한의 4차 핵실험, 잇따른 미사일 시험발사 도발이 이어지면서 2016년 2월10일 당시 박근혜 정부가 전격 폐쇄했다. 북한은 천안함 피격이나 연평도 포격사건 당시 개성공단을 중단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갑작스러운 폐쇄 결정에 북한 역시 적잖이 당황했다. 우리 정부로서도 개성공단 입주 기업의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북한의 도발을 막겠다는 마지막 카드를 집어든 셈이었다.
개성공단 폐쇄 이후 남북 경협은 전면 중단됐다. 북한이 6차 핵실험까지 감행하자 미국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더욱 강화됐다. 북한의 무역 통로와 돈줄을 직접 조이는 방식이었다.
北, 노골적으로 남북 경협 재개 압박하지만…
북한은 최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강하게 반발하며 제재 완화와 남북 경협 부활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13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에선 김윤혁 철도성 부상과 박호영 국토환경보호성 부상, 박명철 민족경제협력위원회 부위원장 등 이른바 ‘경제 일꾼’들을 대거 포진시켰다. 노골적으로 남북 경협 재개를 압박했다는 분석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최근 강원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를 시찰하며 대북 제재에 대해 “강도적인 제재 봉쇄”라고 힐난했다.
북한이 경제제재 완화와 남북 경협 재개를 주장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게 결국 북한의 비핵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에서 섣불리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설령 남북 경협이 재개된다 해도 그동안 북한의 행태를 미뤄볼 때 그 또한 낙관하기만은 어렵다.
● NIE 포인트
남북 경협의 반관반민적 형태와 자연스러운 교역의 차이는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경제 교류에 정치적 위험이 너무 크게 뒤따르면 어떤 여파가 있을지 토론해보자. 남북 경협의 효과적 재개를 위해선 어떤 여건 조성이 필요할지 정리해보자.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정치부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