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다'는 원래 '손톱이나 뾰족한 기구로 바닥이나 거죽을 문지르다'는 뜻이다. 근래에는 신용카드 등의 사용이 보편화되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됐다. '물건 따위를 구매할 때 카드로 결제하다'란 의미가 더해졌다.

2018학년도 수능 국어시험 15번 문항은 어문규범 중 표준어에 대한 이해 정도를 묻는 내용이었다. 표준어와 표준발음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력을 갖췄다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우리말 규범은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에서 1933년 ‘한글마춤법통일안’을 마련하면서 비로소 체계를 갖췄다. 이를 토대로 1936년 10월28일 ‘조선어표준말모음’이 나왔다. 이들이 모태가 돼 지금 쓰고 있는 한글맞춤법과 표준어규정이 틀을 잡을 수 있었다.

단어는 시대 따라 의미 바뀌어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카드는 긋지 말고 긁으세요"
표준어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생성과 전파, 소멸의 단계를 거친다. ‘말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15번 문항 <보기>에 나온 ‘긁다’는 원래 ‘손톱이나 뾰족한 기구로 바닥이나 거죽을 문지르다’는 뜻이다. 여기서 점차 의미가 확대돼 ‘남을 헐뜯다’(그 착한 사람을 왜 긁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공연히 건드리다’(긁어 부스럼) 등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근래에는 신용카드 등의 사용이 보편화되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됐다. ‘물건 따위를 구매할 때 카드로 결제하다’란 의미가 더해졌다(2014년). 문법 용어로 이를 의미변화(확대, 이동, 축소 등이 있다)라고 한다. ‘카드를 긁다’는 ‘긁다’에 또 하나의 용법이 추가된 것이니 의미확대에 해당한다. 하지만 중심적 쓰임새는 여전히 “등을 긁었다” 같은 말에 있다. 그러니 ‘긁다’를 설명한 답지에서 ‘중심적 의미가 수정됐다’고 한 부분은 틀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의미변화란 ‘단어가 본디 꼴대로, 혹은 소리를 더하거나 덜해서 그 뜻을 여러 가지로 바꾸는 일’을 말한다. 가령 ‘싱겁다’는 ‘음식의 간이 보통 정도에 이르지 못하고 약하다’는 뜻이다. “국이 싱거워서 맛이 없다”처럼 쓰는 게 본래 용법이다. 여기서 의미가 확대돼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도 ‘싱겁다’를 쓸 수 있게 됐다. “싱거운 소리는 그만해라” 같은 말이 그런 쓰임새다.

표준어의 가치는 ‘소통 증진’에 있어

홍성호 한국경제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홍성호 한국경제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단어의 진화는 끊임없이 이뤄진다. ‘동양인의 체형은 아담한 편이다.’ ‘그가 이사한 집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흔히 쓰는 이런 표현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적어도 규범적으로는) 바른 표현이 아니었다. ‘아담하다’는 본래 ‘고상하면서 담백하다’는 뜻이다. ‘아담한 옷차림’이라거나 ‘정원을 아담한 색상의 꽃으로 꾸몄다’처럼 쓰인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말을 ‘적당히 자그마하다’란 뜻으로도 많이 썼다. 이런 뜻풀이가 비로소 사전에 추가된 것은 2017년 들어서다.

단어의 의미변화 사례는 부지기수로 많다. ‘열려라 우리말’에서도 여러 차례 다뤘다. ‘주책’을 비롯해 ‘감투, 밥맛, 채신머리, 얌통머리, 싸가지, 엉터리다/엉터리없다, 칠칠하다/칠칠맞다’ 같은 말의 쓰임새를 통해 의미가 바뀐 과정을 살펴봤다.(2017년 6월5일자~7월12일자 참조)

표준어의 필요성과 효용가치는 80여 년 전 처음 나올 때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여전히 우리말의 통일성과 소통 증진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국립국어원의 사전 정보 수정은 두 가지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사전에 없던 현실 언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카드를 긁다’란 표현은 예전엔 없던 말이라 공식적으로 쓰기에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용법에 대한 ‘교통정리’다. 사람에 따라 ‘카드를 긁다/긋다’를 뒤섞어 써서 혼란스럽던 표현에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말에 통일성을 기했다는 점이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