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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중세의 상징' 고딕성당은 어떻게 탄생했나

    “책이 건물을 죽이리라.”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에 등장하는 가톨릭 사제의 독백으로 도도한 시대의 변화를 전한다. 인쇄술의 등장에 따라 정보 유통이 빨라지면서 성당 벽과 스테인드글라스에 빼곡하게 <성서>의 장면을 담아 문맹인 신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던 가톨릭교회가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장악하던 ‘대성당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위고의 표현처럼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을 지닌 대성당은 중세의 상징이었다. 1248년 착공에 들어가 600여 년 뒤인 1880년 완공된 독일 쾰른 대성당과 같은 거대한 대형 석조 건물은 중세 유럽의 사회·경제적 역량이 장기간에 걸쳐 총결집된 작품이었다.중세 봉건영주에게 일차적으로 필요한 건물은 방어시설이었다. 수천 개에 달했을 중세시대 요새는 수없이 파괴됐고 재건됐다. 요새는 공격 무기와 방어 기술 간 끊임없는 경쟁을 의미했다. 성벽은 갈수록 높아졌고, 진입로는 복잡해졌다. 성벽과 탑은 모양이 바뀌고 더욱 견고해졌다. 프랑스 동부 랑그르 요새의 성벽 두께는 6.4m에 달했다. 노르망디 방어를 위해 사자심왕 리처드가 레장들리에 건설한 샤토 가이야르는 방어시설의 길이가 총 3170m에 달했다.당시 건축 설계자들은 오늘날 설계 전문가처럼 상세한 도면을 작성했다. 건축 마이스터는 목공품을 정확하게 맞추기 위해 나무판과 점토, 슬레이트에 도면을 그렸고, 13세기 이후에는 양피지에 건축 도면을 남겼다. 당시의 양피지 도면 22개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보존돼 있기도 하다.오늘날 중세를 상징하는 건물은 대부분 돌로 만들었지만, 처음부터 석조가 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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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살짜리에게 '관직'을 준 고려 음서제

    음서제(蔭敍制)는 고위 관료의 친족을 과거시험 없이 관직에 임명하는 제도다. 고려는 초기부터 5품 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문음(門蔭)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귀족사회의 성립 기반을 닦았다.음서제는 고려 7대 왕인 목종 때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제도는 고려시대 전 시기를 통해 일반화돼 귀족의 자손은 이 통로를 거쳐 관리에 등용되고 가문의 덕택으로 고관까지 오른 경우가 많았다. 고려시대에 음서는 과거와 쌍벽을 이루는 관리 등용의 양대 기둥이었다.이처럼 음서제가 고려 사회에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 음서제가 큰 저항 없이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에게는 생업을 무사하게 다음 세대로 계승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구현하는 것이 위민정치(爲民政治)를 추구하는 국왕의 소임이었고, 주요 관료 등 관리층(官吏層)도 신민(臣民)의 일원으로 그 대상이었다.그러나 사회 상층부를 구성하는 관리층을 무조건 대를 이어 계승시킬 수는 없었다. 이에 관리(官吏)의 소임(所任)을 설정하고, 그들이 쌓은 실적을 공(功)으로 삼아 공헌이 충분히 쌓이면 음(蔭)이 생성되어 후대로 전해지도록 했다. 국왕은 이런 ‘음’을 토대로 직(職)을 수여했다. 관료 등 사회 상층부가 ‘음’을 생성하기 위해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게 하는 장치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이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음서제를 시행하는 데 제약이 적지 않았다. 초기 문음 출신들은 문한(文翰)·학관(學館)직을 맡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권력 핵심부에 들어갔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전원균이나 김방경 같은 사람들은 급제하지 못한 것을 한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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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브 지역 최대 수출품은 '노예'

    9세기 저술가인 바그다드의 이븐 후르다드베는 <도로와 왕국의 책>에서 ‘아르 라다니야’라고 불리는 상인들을 언급했다. ‘안내자’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라단’에서 호칭이 유래했다는 이들은 유대인이었다. 이들 유대인 상인은 “아랍어, 페르시아어, 로마어, 프랑크어, 스페인어, 슬라브어를 사용하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여행한다”고 묘사됐다. 그들은 로마(이탈리아)를 경유해 슬라브족의 땅을 지나, 하자르족의 도시인 함리(이틸)로 가는 길을 이용한다고 전해진다.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다룬 상품. 책에서는 “그들은 서쪽에서 환관, 여성 노예, 어린 소년들, 브로케이드(두껍게 짠 비단), 비버와 흑담비 모피, 그리고 칼을 가져온다”라고 쓰여있다.서유럽과 슬라브족, 아랍 세계의 교역을 중개하던 유대인 상인이 슬라브족에게서 구입한 각종 생필품과 원재료는 상당량이 독일이나 이탈리아로 넘어가 그곳에서 소비됐다. 다만 슬라브 지역 주요 ‘수출품’ 중 북·중 유럽 시장에서 거의 쓰이지 않은 게 있었다. 바로 노예였다. 북·중유럽에선 농업구조상 노예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슬람 점령 아래 있는 이베리아반도(스페인)와 아프리카 지역에는 슬라브족 노예가 ‘대량’으로 수출됐다. 그곳에서 군인과 가사 노동, 장인 작업장의 조수로 활용한 것이다.이슬람 지배 지역에서는 슬라브인 노예 수가 매우 많았다. 압드 아르-라흐만 3세(912~961)의 통치 기간 코르도바에 있던 슬라브인 노예 수는 약 1만4000명에 달했다. 코르도바에서 10세기 후반~11세기 초에 슬라브 노예 출신은 경비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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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보다 비쌌던 보라색 염료

    과거 자연 상태에서 색깔을 표현하는 염료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세기 이후 화학공업이 발달하면서 많은 인공 염료가 개발되기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표현할 수 있는 색상에 제약이 많았다. 특히 검은색 계열에 비해 푸른색을 비롯한 각종 희귀 색상을 표현하는 염료는 구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귀한 색상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귀족의 특권이었고, 특정 색상은 고귀한 신분과 직접적으로 연결됐다.오늘날까지 색을 구현하는 게 희귀한 일이었다는 흔적이 짙게 남은 색상으로는 자주색(보라색)을 꼽을 수 있다. 영어에서 고귀한 혈통, 부유한 탄생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색 속에서 태어났다(born in the purple)”란 문구가 있다. 이 말은 비잔티움 제국(동로마제국)의 황녀가 자주색 옷감을 두른 방 안에서 아이를 낳은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비잔티움 제국에선 황제의 자식들에 대해 문자 그대로 “자주색 속에서 태어난 자”라는 뜻을 지닌 ‘포르퓌로게네토스(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라고 불렀다. 바실레우스(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호칭)의 자식 중에서 콘스탄티노플의 대궁전 내에 별도 공간으로 만든 자줏빛 방인 포르퓌라(Πορφύρα)에서 태어난 아이들만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안나 콤네노스의 묘사에 따르면 이 자줏빛 방은 마르모라해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굽어보고 있었고, 바닥부터 벽면까지 황실의 색깔인 자줏빛으로 도배돼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어두운 자주색의 영어 색상명이 ‘비잔티움(Byzantium)’이기도 하다.이처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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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 대립의 시작 '예루살렘 대학살'

    중세 시대 예루살렘을 둘러싼 성곽은 전 세계 요새 중 매우 강력한 방어 시설 중 하나였다. 로마제국 시기 하드리아누스가 성곽을 정비한 이래 비잔티움제국과 우마이야 왕조, 파티마 왕조에서 지속적으로 성곽을 개보수했기 때문이다.1차 십자군이 원정을 떠났을 당시 예루살렘은 파티마 왕조의 태수인 이프티카르 웃 다왈라가 지휘하는 아랍과 수단 군대가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크족(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군로에 위치한 우물에 독을 풀고 가축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뒤이어 아랍 군대는 예루살렘 내에 거주하던 기독교 주민을 당시의 관행대로 성곽 외부로 이주시켰다. 유대인은 이전처럼 예루살렘 시내에 머무는 게 허용됐다.기독교도를 성 밖으로 쫓은 것은 공성전 기간에 식량 소모를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무기를 드는 게 금지돼 군사적으로도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십자군과 내통할 것이란 우려 또한 이런 조치의 근거가 됐다. 하지만 관례대로 종교적 관용은 유지됐고, 종교를 빌미 삼은 학살은 없었다.비록 알하킴 칼리프 시대의 기독교 탄압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기독교도의 수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정교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는 예루살렘 시내에 수천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예루살렘 공성전은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벽에 도달한 1099년 6월 7일 시작됐다. 하지만 방어군의 준비가 우월해 공략은 실패했다. 식수 부족과 더위로 고전하던 십자군에게 이슬람 세력 지원군까지 들이닥치면서 어려움은 가중됐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은 십자군의 종교적 열정을 더욱더 강하게 불 지폈고 공격을 계속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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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제 무너뜨린 중세의 장원

    장원(seigneurie)은 노예제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흥기한 시스템이다. 고대 유럽에서 널리 퍼진 노예제는 9세기가 되어 거의 종막에 다가가고 있었다.1세기경 유럽 전역에는 노예제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전쟁 포로와 유괴, 매매 등 다양한 방식으로 노예가 공급됐다. 당대의 부호들은 집안일뿐 아니라 농업에 종사하는 대규모 노예 집단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노예제가 정점을 지났더라도 오랜 기간 노예는 낯설지 않은 존재로 여겨졌다. 이는 메로빙거 왕조 초기에도 변함이 없었다. 투르의 그레고리는 편지에서 이탈리아에서 잡아 온 포로들이 프랑크 왕국 노예시장에 팔리고, 나폴리에는 골 지방에서 약탈한 노예가 거래된 모습을 묘사했다. 그래도 이 시기는 이전과 비교해 노예의 중요도가 크게 줄었다. 여자 노예들은 영주 방앗간의 방아를 돌리거나 양 떼를 돌보는 일 정도를 맡았을 뿐이다.하지만 2~3세기 더 지나 카롤링거 왕조 시기가 되면 노예의 중요성은 더욱더 떨어진다. 서유럽에서 노예는 주로 집안일과 같은 중요치 않은 허드렛일이나 맡는 수준이 됐다.이처럼 유럽에서 노예제가 쇠하게 된 데에는 군사적·종교적·경제적 이유가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경제적 이유다. 역사학자 앤서니 앤드루스에 따르면 노예에게 투자하는 것은 수익이 상당히 적고, 토지만큼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노예 공급이 풍부하고 노예 가격이 저렴한 한도 내에서만 노예 투자는 합리적 경제행위였다는 설명이다. 더글러스 노스도 고대 노예제가 중세 봉건제 장원경제로 넘어간 이유로 노예 시스템을 강요하는 비용이 많이 들고, 상대적으로 노예 감시 및 감독 비용도 다른 체제에 비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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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정가격' 이념, 중세 유럽 시장을 옥죄다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는 재위 기간 내내 흉년에 적용하는 각종 가격표를 발표했다. 806년에 선보인 법령에선 “곡물이나 와인을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탐욕에 따라 비축하는 자, 예를 들어 1모디우스(곡물 계량 단위)의 곡물을 2데나리우스에 사서 4데나리우스, 6데나리우스 혹은 그 이상의 가격에 다시 팔 수 있을 때까지 보관하는 자는 부정한 이익을 취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밝혔다.중세 유럽에선 ‘공정가격’ ‘정의로운 가격’이라는 개념이 널리 힘을 얻으면서 얼마 안 되는 소규모 시장마저 옥좼다. 종교의 교리는 일상생활의 의무가 됐고, 각종 신학적 개념이 덧붙으면서 더 많은 경제적 규제를 초래했다. 결과적으로는 생활 수준의 향상에도 걸림돌이 됐다.당시 유럽에서 가격은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었다. 중세 영국에서는 국가 정부뿐 아니라 길드와 지방자치단체까지도 가격통제를 정상적인 행위로 여겼다. 13세기 영국 관리들은 “개인의 사리사욕이 불의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종류의 거래를 규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1199년, 영국 정부는 와인의 도소매 가격을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이 무모한 시도는 시행되기도 어려웠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와인 가격을 통제하고자 하는 열망은 수그러지지 않아 1330년 상인들에게 수입 및 기타 비용을 합친 ‘합리적 가격’에 판매하도록 강제하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몇 년 후 경제 상황이 변하면서 와인 가격은 1330년 가격보다 훨씬 뛰었고, 정부는 시장에 패배했음을 인정해야 했다.밀과 빵 가격 관리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헨리 3세는 다양한 무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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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시'와 '처벌'의 공간, 중국 장안성(城)

    ‘세계 제국의 수도’라 불린 당나라 장안에 사는 사람들은 사실상 애완동물 취급을 받았다. 중국의 전제 왕권은 두꺼운 벽으로 사방이 막힌 방장(坊墻) 속에 사람들을 밀어 넣은 뒤 주거와 통행의 자유는 물론, 생업의 종류까지 통제했다.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을 지배할 때 말이나 양을 우리에 집어넣듯 사람을 가축 취급한 것이다.당시 장안성은 거주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면적보다 훨씬 크게 조성되었다. 실제 필요보다 과도하게 큰 장안성은 면적이 비잔티움의 7배, 바그다드의 6.2배에 달했다. 그 결과, 장안 남곽 부근 방 39개는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빈방으로 놀렸다. 높고 큰 우리를 108개나 만들어놓고선 장안으로 찾아오는 자들로 차곡차곡 채워나간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속 동물처럼 ‘뚜껑 없는 거대한 상자’인 방 속에서 사육된 셈이다.바둑판형으로 도시를 구획하면서 봉쇄식 방장제를 도입한 장안성은 성곽과 방장을 먼저 만든 후 주민들을 그 속에 들어가 살게 했다. 주민들은 성밖에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2개나 4개의 방문을 통해 주간에만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만약 주민이 방장을 ‘넘어서’ 외출하면 중죄로 취급해 태장 70회가 가해졌다. 밤에 월장하는 경우에도 태장 20회의 중형에 처했다. 새벽과 저녁에 북 치는 소리에 따라 성문과 방문이 개폐됐고, 모든 주민은 황제가 정한 시간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생활했다.또 방장 속 주민들은 국가가 지정한 일만 해야 했다. 주민들을 분할통치하면서 할당생산제를 추진했다. 각 방장의 문에는 수졸을 배치, 특정 산품을 생산하는 하층민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일정 지역에 주거를 한정시킨 뒤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