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바꾼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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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노예제 무너뜨린 중세의 장원
장원(seigneurie)은 노예제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흥기한 시스템이다. 고대 유럽에서 널리 퍼진 노예제는 9세기가 되어 거의 종막에 다가가고 있었다.1세기경 유럽 전역에는 노예제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전쟁 포로와 유괴, 매매 등 다양한 방식으로 노예가 공급됐다. 당대의 부호들은 집안일뿐 아니라 농업에 종사하는 대규모 노예 집단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노예제가 정점을 지났더라도 오랜 기간 노예는 낯설지 않은 존재로 여겨졌다. 이는 메로빙거 왕조 초기에도 변함이 없었다. 투르의 그레고리는 편지에서 이탈리아에서 잡아 온 포로들이 프랑크 왕국 노예시장에 팔리고, 나폴리에는 골 지방에서 약탈한 노예가 거래된 모습을 묘사했다. 그래도 이 시기는 이전과 비교해 노예의 중요도가 크게 줄었다. 여자 노예들은 영주 방앗간의 방아를 돌리거나 양 떼를 돌보는 일 정도를 맡았을 뿐이다.하지만 2~3세기 더 지나 카롤링거 왕조 시기가 되면 노예의 중요성은 더욱더 떨어진다. 서유럽에서 노예는 주로 집안일과 같은 중요치 않은 허드렛일이나 맡는 수준이 됐다.이처럼 유럽에서 노예제가 쇠하게 된 데에는 군사적·종교적·경제적 이유가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경제적 이유다. 역사학자 앤서니 앤드루스에 따르면 노예에게 투자하는 것은 수익이 상당히 적고, 토지만큼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노예 공급이 풍부하고 노예 가격이 저렴한 한도 내에서만 노예 투자는 합리적 경제행위였다는 설명이다. 더글러스 노스도 고대 노예제가 중세 봉건제 장원경제로 넘어간 이유로 노예 시스템을 강요하는 비용이 많이 들고, 상대적으로 노예 감시 및 감독 비용도 다른 체제에 비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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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공정가격' 이념, 중세 유럽 시장을 옥죄다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는 재위 기간 내내 흉년에 적용하는 각종 가격표를 발표했다. 806년에 선보인 법령에선 “곡물이나 와인을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탐욕에 따라 비축하는 자, 예를 들어 1모디우스(곡물 계량 단위)의 곡물을 2데나리우스에 사서 4데나리우스, 6데나리우스 혹은 그 이상의 가격에 다시 팔 수 있을 때까지 보관하는 자는 부정한 이익을 취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밝혔다.중세 유럽에선 ‘공정가격’ ‘정의로운 가격’이라는 개념이 널리 힘을 얻으면서 얼마 안 되는 소규모 시장마저 옥좼다. 종교의 교리는 일상생활의 의무가 됐고, 각종 신학적 개념이 덧붙으면서 더 많은 경제적 규제를 초래했다. 결과적으로는 생활 수준의 향상에도 걸림돌이 됐다.당시 유럽에서 가격은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었다. 중세 영국에서는 국가 정부뿐 아니라 길드와 지방자치단체까지도 가격통제를 정상적인 행위로 여겼다. 13세기 영국 관리들은 “개인의 사리사욕이 불의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종류의 거래를 규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1199년, 영국 정부는 와인의 도소매 가격을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이 무모한 시도는 시행되기도 어려웠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와인 가격을 통제하고자 하는 열망은 수그러지지 않아 1330년 상인들에게 수입 및 기타 비용을 합친 ‘합리적 가격’에 판매하도록 강제하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몇 년 후 경제 상황이 변하면서 와인 가격은 1330년 가격보다 훨씬 뛰었고, 정부는 시장에 패배했음을 인정해야 했다.밀과 빵 가격 관리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헨리 3세는 다양한 무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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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의 공간, 중국 장안성(城)
‘세계 제국의 수도’라 불린 당나라 장안에 사는 사람들은 사실상 애완동물 취급을 받았다. 중국의 전제 왕권은 두꺼운 벽으로 사방이 막힌 방장(坊墻) 속에 사람들을 밀어 넣은 뒤 주거와 통행의 자유는 물론, 생업의 종류까지 통제했다.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을 지배할 때 말이나 양을 우리에 집어넣듯 사람을 가축 취급한 것이다.당시 장안성은 거주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면적보다 훨씬 크게 조성되었다. 실제 필요보다 과도하게 큰 장안성은 면적이 비잔티움의 7배, 바그다드의 6.2배에 달했다. 그 결과, 장안 남곽 부근 방 39개는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빈방으로 놀렸다. 높고 큰 우리를 108개나 만들어놓고선 장안으로 찾아오는 자들로 차곡차곡 채워나간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속 동물처럼 ‘뚜껑 없는 거대한 상자’인 방 속에서 사육된 셈이다.바둑판형으로 도시를 구획하면서 봉쇄식 방장제를 도입한 장안성은 성곽과 방장을 먼저 만든 후 주민들을 그 속에 들어가 살게 했다. 주민들은 성밖에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2개나 4개의 방문을 통해 주간에만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만약 주민이 방장을 ‘넘어서’ 외출하면 중죄로 취급해 태장 70회가 가해졌다. 밤에 월장하는 경우에도 태장 20회의 중형에 처했다. 새벽과 저녁에 북 치는 소리에 따라 성문과 방문이 개폐됐고, 모든 주민은 황제가 정한 시간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생활했다.또 방장 속 주민들은 국가가 지정한 일만 해야 했다. 주민들을 분할통치하면서 할당생산제를 추진했다. 각 방장의 문에는 수졸을 배치, 특정 산품을 생산하는 하층민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일정 지역에 주거를 한정시킨 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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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인류의 경제는 발전하기만 하는 걸까?
오늘날 현대인에게 경제성장은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인류사의 대부분 기간에 이루어진 성장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지속적 성장은 산업혁명 이후의 특이한 일이었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당대인에게 경제적 측면에서 가장 뚜렷하게 체감됐다. 로마제국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유럽은 이슬람 세력이 부상하면서 동방과의 교역선이 끊기자 자급자족경제로 전락해 점점 쇠퇴하게 된다. 이전까지 갈리아에선 마르세유 등의 무역항을 통해 콘스탄티노플, 이집트, 에스파냐, 이탈리아 등지에서 수입한 파피루스와 향료·고급 직물·포도주·올리브유 등 동방의 생산품을 수입했다. 하지만 이들 시리아나 동방에서 갈리아 지역으로 수입하던 상품은 8세기경에 이르러 수입로가 완전히 막혀버린다.수출할 물건도 거의 없었다. 남은 극소수의 무역선을 이용해 동방에 내놓을 만한 것은 노예 정도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어려운 데다 수지타산도 맞지 않았다.자연스럽게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상품부터 사라져갔다. 가장 먼저 파피루스가 없어졌다. 서유럽 지역에서 파피루스에 쓴 작품은 대부분 6~7세기 이전의 것이다. 메로빙거 시대에는 왕실 사무국에서 파피루스만 사용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파피루스보다 두껍고 다루기 불편한 데다 질도 떨어지는 양피지로 대체됐다. 8세기 말까지도 일부 개인 문서에서는 파피루스가 사용됐지만, 이는 예전에 수입해 보관하던 것을 이용한 것이다. 재고가 떨어진 뒤에는 그나마 이런 호사도 불가능해졌다. 중세사가 앙리 피렌은 “갈리아에서 파피루스가 사라진 것은 상업이 쇠퇴하고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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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 속 금·은 비율은 '경제 상황' 알려주는 지표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영원할 것만 같던 로마제국의 영광도 서서히 빛을 잃었다. 3세기 이후 로마의 영토 확장이 한계에 이르면서 정복을 통한 전리품 유입이 크게 줄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씀씀이는 변함이 없었다. 대규모 공사와 왕실의 사치를 위한 자금 수요는 끝이 없었다. 또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황제들은 많은 재물을 계속 풀어야 했다. 제정 로마 시기의 ‘경제 위기’를 살피는 지표로 흔히 언급되는 것이 주화에 함유된 귀금속 비율이다.은화인 데나리우스와 금화인 아우레우스에 포함된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의 비율은 지속해서 줄었다. 주화의 액면가치는 그대로 둔 채 크기와 함량을 줄이는 ‘장난’을 쳐서 동일 양의 금속으로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방법은 돈이 필요할 때 세금을 올리는 방식보다 시민들의 저항도 훨씬 적었다.로마시대에 교환의 기준 역할을 한 것은 무게 3.65g짜리 데나리우스였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데나리우스 은화는 순은 함유량이 90~100%에 가까웠다. 이런 수준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160년경부터는 은 함유량이 80%로 바뀌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는 함유량이 지속적으로 줄었다. 193년 77%이던 은 함유량은 194년 66%, 200년 61%로 하락했고, 마침내 55~58% 수준에 이르렀다.카라칼라 황제 시대가 되면 은 함유량이 50%만 넘어도 좋은 은화로 여겨졌고, 로마제국은 결국 새로운 은화인 안토니니아누스를 주조했다. 새 주화는 명목상으론 2데나리우스의 가치를 표방했지만, 실제 가치는 기존 데나리우스화의 1.6배에 불과했다. 무게도 데나리우스화보다 줄어 5.18g(2데나리우스는 7.3g)이었다.하지만 새 주화도 여전히 은 함유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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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국가 멸시하는 시각은 어떻게 확산됐나
고대 중국에서 뿌리내린, 나와 남을 구분하고 타자를 ‘인간 이하의 동물 같은 존재’로 바라보는 세계관은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 국가로 퍼졌다.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 각지에 오랜 후유증을 남겼다.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율령제(律令制)의 확산이다. 율령제는 중국식 화이사상(華夷思想)을 확산하는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중국과 가장 먼저 직접 접촉한 고구려부터 중국을 빼닮은 자국 중심적 세계관이 발현됐다. 414년에 조성된 광개토대왕비에서부터 자신을 높이고 주변을 깎아내리는 시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비문 곳곳에서 ‘노객(奴客)’ ‘귀왕(歸王)’ ‘궤왕(跪王)’ 등 남을 폄훼하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자신들에게 복속한 주변 집단에 대해 자신들을 정점으로 하는 상하 관계로 서열을 매겼다. 백제를 겨냥한 ‘백잔(百殘)’ ‘잔국(殘國)’ ‘잔주(殘主)’ 등의 비칭(卑稱)에서도 자국 중심적 세계관이 진하게 느껴진다.4~5세기경이 되면 고구려는 주변의 신라, 예(濊), 동옥저(東沃沮) 등을 포함한 자신들만의 세계관, 그들만의 질서를 구축했다. 고구려에 신라는 “예부터 속민(屬民)으로 고구려에 조공하는”(광개토대왕비) 존재였으며, 고구려는 “동이(東夷) 매금(寐錦) 위에 군림하는”(충주 고구려비) 존재였다.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모두루묘지)이자 ‘천손의 나라’(신포시 오매리 절골터 금석문)였다. 일본 역사학자 고치 하루히토(河內春人)는 “고구려가 수당과의 전쟁에서 말갈(靺鞨)을 동원하는 등 주변에 영향력을 실제로 행사하는 데 중화사상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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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우리는 존귀, 이민족은 야만"…우월적 사고의 기원
자신이 속한 집단을 높이고, 외부 민족을 짐승이나 벌레에 비유하거나 머나먼 상상 속 공간에 사는 괴물처럼 묘사하는 사고방식은 세계 각지의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인이 주변 이민족을 두고 “말을 제대로 못 한 까닭에 마치 짐승처럼 ‘버~ 버~’ 소리를 내는 존재”라며 ‘바르바로이(βάρβαροι)’ 라고 부른 것이 대표적 사례다. 기후가 좋은 이탈리아반도 출신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게르만 민족의 풍속을 그린 <게르마니아>에서 “게르마니아는 삼림들로 인해 섬뜩하고 늪지들로 인해 보기 흉한 지역”이라며 “이곳에서 과수는 키울 수 없고, 가축은 수는 많지만 대부분 보잘것없다”고 박하게 평가했다. “뿔 있는 짐승까지도 번듯한 뿔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묘사는 타지에 대한 폄하와 적개심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조성되는지와 이를 타파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를 잘 보여준다.반면 자신들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신이 점지한 특별한 존재라는 의식도 ‘보편적’이라고까지 부를 만큼 ‘흔한’ 현상이다. 중국에서 황제를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천자(天子)라고 일컬은 것처럼 유목민족인 흉노족을 이끈 지도자인 ‘선우(單于)’도 자신을 하늘이나 천신에 비견할 만한 자격을 부여받은 특별한 존재로 여긴 게 대표적이다. 선우의 공식 호칭은 ‘탱리고도선우(撐犁孤塗單于)’로, 하늘을 뜻하는 ‘탱그리(撐犁)’의 자손인 위대한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흉노제국을 통일한 묵특선우(冒顿单于)는 한나라 문제(文帝)에게 보낸 서한에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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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나라님 탓'이란 생각의 출발점은?
“무제가 즉위한 후 동중서(董仲舒)는 강도(江都)의 국상(國相)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춘추>에 기재된 자연재해와 특이한 현상 변화를 보고 음양(陰陽)의 도가 바뀌는 원인을 유추했다. 따라서 비가 내리길 청할 때는 모든 양기(陽氣)를 가두고 모든 음기(陰氣)를 방출시켰다. 비가 그치길 청할 때는 그 반대의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방법을 강도국에도 적용해 실행했는데, 원하는 대로 실행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나쁜 짓을 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거나 정치 지도자의 잘못을 두고 하늘이 천재지변으로 경고한다는 생각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통상 사마천의 <사기(史記)> 유림열전(儒林列傳)에 등장하는 전한 시대 유학자 동중서(董仲舒)가 이런 원시적 사고를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구체화한 인물로 평가된다. <사기>에 묘사된 동중서는 자유롭게 비를 내리게도, 그치게도 하는 인물이다. ‘음양의 조화’를 탐구해 비를 부르고, 그치게 하는 ‘도사’와 같은 존재인 것.동중서는 각종 재이(災異)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음양의 변화’를 꼽았다. 그가 판단 근거로 삼은 것은 <춘추(春秋)>였다. <춘추>가 다루는 242년간의 시기에 등장하는 홍수, 가뭄, 일식, 지진, 혜성, 운석, 서리, 폭설, 해충, 한해와 같은 재이(災異)에 대해 동중서는 그 재난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음양설(陰陽說)에 기초해 설명했다. 그는 “봄과 여름의 주도적인 양기나 가을과 겨울의 주도적인 음기는 하늘(天)에 있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다”고 주장하며 자연 세계에 적용되던 음양의 원리를 인간세계에까지 확장했다.때마침 <춘추>가 다루는 세계에선 홍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