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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의문의려 (倚門倚閭)

    ▶한자풀이倚 : 기댈 의門 : 문 문倚 : 기댈 의閭 : 이문려'문에 기대어 기다린다'는 뜻으로자식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  - 《전국책(戰國策)》춘추시대 왕손가(王孫賈)는 열다섯에 제(齊)나라 민왕을 모시는 신하가 되었다. 왕손가의 어머니는 그가 입조(入朝)해 집에 늦게 돌아올 때면 문 앞에 기대 서서 아들을 기다리곤 했다.연(燕)나라가 제나라의 도성 임치(臨淄)를 급습해 민왕이 피신했다. 왕손가는 이 소식을 듣고 황급히 뒤쫓았으나 왕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꾸짖듯 물었다. “연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는데, 너는 어찌하여 왕을 보호하지 않느냐?” “저는 왕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습니다.”어머니가 버럭 화를 냈다. “네가 아침에 나가 늦게 돌아올 때면 나는 대문에 기대 네가 돌아오는지 바라보았고, 네가 저녁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마을 문 앞에 기대어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女朝出而晩來 則吾倚門而望 女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 너는 지금 왕을 섬기는 몸으로 왕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찌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냐.”어머니 말에 왕손가가 다시 민왕의 행방을 알아보니, 이미 초(楚)나라 장군 요치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왕손가는 사람들을 규합해 요치를 주살했다. 전한 시대 유향이 전국 시대 전략가들의 책략을 모은 《전국책》에 나오는 고사다. 참고로 주(周)나라 때 행정구역으로 스물다섯 집을 리(里)라 했는데, 리마다 세운 문 곧 이문(里門)을 려(閭)라고 한다.의문의려(倚門倚閭)는 ‘문대 기대어 기다린다’는 뜻으로, 밖에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모의 간절한 심정을 비유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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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마태수 (三馬太守)

    ▶한자풀이 三 : 석 삼馬 : 말 마太 : 클 태守 : 지킬 수세 마리의 말만 타고 오는 수령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백리를 이름   -조선시대 송흠(宋欽)의 고사송흠(宋欽)은 조선 성종 때 외교문서를 담당한 승문원에서 일하다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해 관직에서 쫓겨났다. 중종반정으로 복직해 홍문관 박사 등의 관직에 올랐다. 특히 그는 1528년 담양부사가 된 뒤 장흥부사, 전주부윤, 전라도 관찰사 등 지방의 외직(外職)에 여러 해 있었다.당시 조선은 지방관이 사용할 수 있는 역마(驛馬)의 수를 관직에 따라 법으로 정해 놓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부사(府使: 지방 장관직)는 부임이나 전임 시 짐을 운반하는 태마(駄馬) 한 필을 포함해 세 필의 말을 쓰고, 수행원을 위해 네 필의 말을 쓸 수 있었다. 때문에 대다수 지방관은 7~8필의 말을 데리고 떠들썩하게 부임하고 전임했다.하지만 송흠은 늘 세 필의 말만으로 검소하게 행차하고 짐도 단출했다. 지극한 효성과 청렴으로 이름이 높아지면서 백성들은 그를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렀다. 삼마태수는 ‘세 마리의 말만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렴한 관리를 이른다. 맑고 흰 벼슬아치를 이르는 청백리(淸白吏)도 뜻이 같다.《고려사(高麗史)》에도 비슷한 고사가 전해진다. 고려 충렬왕 때 승평부(현재의 순천)의 부사로 있던 최석(崔碩)이 비서랑이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말을 바치며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 청했다. 최석이 웃으며 사양했다. “말은 경도(京都)에만 이를 수 있으면 될 것을 골라서 무엇하겠느냐” 하고는 모두 되돌려 보냈다. 마을 사람들이 말을 받지 않자 망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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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張三李四 (장삼이사)

    ▶한자풀이 張 : 베풀 장三 : 석 삼李 : 성씨 이四 : 넉 사장씨의 셋째 아들과 이씨의 넷째 아들이름과 신분이 분명치 않은 평범한 사람  - 《항언록(恒言錄)》장삼이사(張三李四)는 장씨의 셋째 아들과 이씨의 넷째 아들이란 뜻으로 이름이나 신분이 분명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을 이른다.청나라 시대의 속어를 모은 《항언록(恒言錄)》에는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말은 갑(甲) 아무개, 을(乙) 아무개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는 송나라 때부터 전해오는 속어(俗語)다’라는 구절이 있다. 송나라 고승 도언이 쓴 불교 서적 《전등록(傳燈錄)》은 장삼이사를 ‘사람에게 성리(性理)가 있음은 아나, 그 모양이나 이름을 지어 말할 수 없음을 비유한다’고 풀이하고 있다.갑남을녀(甲男乙女)도 갑이라는 남자와 을이라는 여자라는 뜻으로, 신분이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을 이른다. 필부필부(匹夫匹婦) 역시 이름 없는 남편과 아내를 이르지만 평범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 흔히 쓴다. 초동급부(樵童汲婦) 또한 땔나무를 하는 아이와 물을 긷는 여자라는 뜻으로, 보통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범부(凡夫)는 평범한 사내를 지칭하지만 번뇌에 얽매여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절구질하는 사람이란 뜻의 과구중인(科臼中人), 흔하게 나오는 물고기와 조개라는 뜻의 상린범개(常鱗凡介) 역시 평범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뜻은 조금 다르지만 사공견관(司空見慣)은 흔히 보는 물건이라 신기하지 않음을, 가담항설(街談巷說)은 길거리에 떠도는 그저 그런 이야기를 의미한다.누구나 세상에 이름 석 자 새기길 원한다. 대리석에 새겨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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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糟糠之妻 (조강지처)

    ▶한자풀이  糟 : 지게미 조糠 : 겨 강之 : 갈 지妻 : 아내 처지게미와 쌀겨를 함께 먹어온 아내가난을 같이 견뎌낸 본부인을 이름      - 《후한서(後漢書)》송홍(宋弘)은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를 섬겨 대사공(大司空)에까지 올랐다. 그는 성품이 온후하고 강직했다. 어느 날 광무제가 미망인이 된 누님 호양공주에게 신하 중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의중을 떠봤다. 호양공주가 송홍을 칭찬했다.“송공의 위엄 있는 자태와 덕행을 따를 만한 신하가 없습니다.”며칠 후 광무제는 병풍 뒤에 호양공주를 앉혀놓고, 송홍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광무제가 송홍에게 물었다. “속담에 귀해지면 사귐을 바꾸고, 부자가 되면 아내를 바꾼다고 하는데 그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겠지?”송홍이 지체없이 답했다. “아닙니다. 신은 가난하고 비천한 때 사귄 벗은 잊으면 안 되고 지게미와 쌀겨를 먹으며 고생한 아내는 집에서 쫓아내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貧賤之友 不可忘 糟糠之妻 不下堂).”이 말에 광무제와 호양공주는 크게 낙담했다.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얘기로, 조강지처(糟糠之妻)는 지게미(술을 거르고 남은 찌꺼기)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가며 함께 고생한 아내를 일컫는다.미망인(未亡人)은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란 뜻으로, 남편을 먼저 잃고 배우자 없이 홀로 사는 여자를 가리킨다. 과수(寡守)라고도 부른다. 금슬(琴瑟)은 거문고와 비파로, 부부 사이의 정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화촉(華燭)은 ‘빛깔 들인 밀초’라는 원뜻이 바뀌어 혼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부해지면 처신도 바뀐다. 재물이 모이면 지난날을 잊고 없는 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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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反哺報恩 (반포보은)

    ▶한자풀이 反 : 돌이킬 반哺 : 머금을 포報 : 갚을 보恩 : 은혜 은먹이를 돌려드려 은혜에 보답함자식의 깊은 효심을 비유하는 말  - 조선시대 가객 박효관(朴孝寬)의 시조까마귀 새끼는 자라서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줌으로써 키워준 은혜에 보답한다고 한다. 조선시대 가객(歌客) 박효관(朴孝寬)은 이런 얘기를 빗대 시조를 지었다.뉘라서 까마귀를 검고 불길한 새라 하였는고반포보은(反哺報恩)이 그 아니 아름다운가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퍼하노라반포보은(反哺報恩)은 먹이를 돌려드림으로써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깊은 효심을 이르는 말이다. 이 시는 박효관이 그의 제자 안민영과 함께 편찬한 《가곡원류》에 실려 있다. 《가곡원류》는 김천택의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집(歌集)으로 뽑힌다. 박효관은 조선 말기 악공으로 시와 노래, 술과 거문고 그리고 바둑으로 일생을 보낸 풍류객이다.반포지효(反哺之孝)도 자식이 자라서 부모를 봉양함을 이르며, 반포보은과 뜻이 같다. 백유의 효심을 일컫는 백유지효(伯兪之孝),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한다는 동온하청(冬溫夏), 저녁에는 잠자리를 돌봐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린다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은 모두 자식의 지극한 효(孝)를 이르는 말이다.효자애일(孝子愛日). 효자는 날을 아낀다고 했다. 자식이 공양하고자 해도 부모는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 풍수지탄(風樹之歎)은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부모에게 효를 하고자 해도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풍목지비(風木之悲)로도 쓴다.공자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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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無愧我心 (무괴아심)

    ▶한자풀이無 : 없을 무愧 : 부끄러워할 괴我 : 나 아心 : 마음 심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한다남을 탓하기 전에 나를 돌아봄   - 《명나라 정치가 유기(劉基)》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겸양지심(謙讓之心)은 유가(儒家)의 큰 덕목이다. 맹자는 인간 본성에 네 가지 선한 씨앗이 있다고 했는데, 그중 하나가 겸양지심, 즉 예(禮)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인 인(仁),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인 의(義),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인 지(智)와 함께 사단지심(四端之心)에 속한다.군자의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키고, 소인의 손가락은 남을 향한다. 소인은 일이 잘못되거나 허물이 생기면 그 탓을 남에게서 찾는다. ‘네 탓이오’를 입에 담고 산다. 명나라 정치가이자 시인 유기(劉基)는 이런 소인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다만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구할 뿐이다.(豈能盡如人意 但求無愧我心)”무괴아심(無愧我心)은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한다’는 뜻으로, 남의 허물을 탓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의미다. 무괴아심은 《대학》 《중용》에 나오는 신독(愼獨)과도 맥이 닿는다. 신독은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그러지지 않게 스스로 삼가는 것을 뜻한다. 마음을 들춰봐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율곡 이이는 신독을 배움의 시작으로 봤다.가고가하(可高可下)의 직역은 ‘높아도 가하고 낮아도 가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벼슬이 높아도 거만하지 않고 낮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그러니 가(可)는 부끄럽지 않고 떳떳한 마음이다. 높아도 오만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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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如鳥數飛 (여조삭비)

    ▶한자풀이如 : 같을 여鳥 : 새 조數 : 셀 삭飛 : 날 비새가 자주 하는 날갯짓과 같다쉬지 않고 배우고 익힘을 비유   - 《논어(論語)》배운 자가 부족함을 안다. 그러니 배운 자가 더 배운다. 세상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공자는 평생 배우고 익힘을 강조했다. 《논어》는 ‘배우고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한다. 공자에게 익힘은 배움의 실천이다. 말만 번지르르한 게 아니라 배움을 몸소 행하는 게 인(仁)이다. 낮잠 자는 재여를 꾸짖는 공자의 말은 준엄하다.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썩은 흙으로 친 담은 흙손질을 할 수 없다. 내가 이제까지는 너의 말만을 믿었지만 앞으로는 너의 행실까지 살펴야겠구나.” 배움의 자세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뜻이 오롯이 담긴 꾸짖음이다.《논어》 학이편에는 여조삭비(如鳥數飛)라는 말이 나온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수없이 날갯짓을 해야 하는 것처럼 배움도 쉬지 않고 연습하고 익혀야 한다는 뜻이다. 주자(朱子)는 익힐 습(習)을 ‘어린 새의 반복된 날갯짓’으로 풀이했다. 배움과 익힘은 반복된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십벌지목(十伐之木). 열 번 찍어 아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했다. 한걸음에 천 리를 가지 못하고, 날갯짓 한 번으로 하늘로 치솟지 못한다.노력과 연관된 사자성어도 많다.분골쇄신(粉骨碎身)은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진다는 뜻으로,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을 일컫는다. 남을 위해 고생을 아끼지 않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불철주야(不撤晝夜)는 낮밤을 가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쉬지 않고 어떤 일에 힘씀을 이른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은 백 번 꺾여도 굴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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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盤根錯節 (반근착절)

    ▶한자풀이  盤 : 서릴 반根 : 뿌리 근錯 : 섞일 착節 : 마디 절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복잡하게 얽혀 해결이 매우 어려움  - 《後漢書(후한서)》후한(後漢)의 안제(安帝)는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 임금의 처지가 대개 그렇듯 그 또한 수렴청정하는 등(鄧)태후와 군권을 쥔 대장군 등즐(鄧)의 권세에 눌려 한낱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그 무렵 서쪽 변방은 티베트 계열인 강족이 자주 침범하고 선비족과 흉노족까지 호시탐탐 영토를 노려 병주 양주 두 지역 상황이 긴박했다. 등즐은 나라 창고가 빈 데다 양쪽을 동시에 지키는 건 무리라는 구차한 이유로 양주를 포기하려 했다. 낭중(郎中) 우후(虞)가 극력 반대했다.“양주는 옛날부터 유능한 선비와 장수를 많이 배출한 곳일뿐더러 그곳을 잃으면 당장 서울이 위험해집니다. 대체로 서쪽 지역 사람들은 생활 자체가 군병(軍兵)이나 다름없기에 적도 두려워하는데, 그곳을 포기해 그곳 사람들이 내지로 이주해 오면 또 다른 분쟁의 불씨가 될 게 뻔합니다.”우후가 조목조목 양주 포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중신들마저 이구동성으로 동조하고 나서자 등즐은 마지못해 자기 복안을 철회했다. 그 일로 등즐은 우후를 혼내줄 기회를 기다렸는데, 마침 하남의 조가현이라는 지방에 비적(匪敵: 무장하고 떼지어 다니며 사람을 해치는 도둑)이 들끓어 현령이 살해됐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등즐은 우후를 신임 현령에 임명해 비적 소탕을 명했다.“대장군이 저번 일로 앙심을 품고 공을 욕보이려는 수작이니 조심하시오.” 우후는 주위의 걱정에 태연했다. “걱정들 마시오. ‘얽히고설킨 뿌리와 마디(盤根錯節)’에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