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노 박사의 시장경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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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사람은 언제 지갑을 열까?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 후끈 달아오른 지면을 걷노라면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입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한 물 한 모금, 차디찬 얼음 한 조각이 간절한 순간, 눈앞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인다면 어떻게 할까?욕망과 주관적 만족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주저 없이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살 것이다. 너무 덥고 목말라 설령 5000원이라도 기꺼이 사 먹을 용의가 있으리라. 혀끝부터 시작되는 차갑고 달콤한 행복이 입안 전체를 가득 채우는 쾌감은 분명 2000원어치 만족 그 이상일 것이다. 그다음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더 사 먹는다면 어떨까? 여전히 아이스크림은 맛있지만 처음 한 입을 베어 물었을 때만큼 짜릿한 기쁨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때 만족도는 아이스크림 가격 2000원보다 조금 위가 될 것이다. 세 번째는 어떨까? 하나쯤 더 먹고 싶기도 하고, 그만 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2000원을 지불하고 사 먹을 용의가 있다. 네 번째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이미 충분히 맛보고 더위와 목마름을 해소했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이 500원이라고 해도 딱히 먹고 싶은 마음이 없기에 지갑을 닫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나갈 것이다.앨프리드 마셜의 원리이처럼 똑같은 아이스크림이라고 해도,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하는 욕망이 순차적으로 줄어드는 이유는 소비자가 느끼는 아이스크림의 효용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효용이란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면서 느끼는 만족의 정도이다. 즉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재화의 능력 또는 재화를 소비하면서 얻는 주관적 만족의 정도”이다.효용이 중요한 까닭은 ‘주관적인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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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일회용품 사용은 죄악인가
환경주의자들은 일회용품을 무척 싫어한다. 일회용품이야말로 인간의 게으름이 환경을 파괴하는 상징과도 같다는 것이다. 환경주의자들이 자신들만 일회용품 쓰길 거부한다면야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런데 환경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일회용품을 쓰지 못하도록 제도를 마련하라고 요구한다.정부와 환경주의자들의 강권그런 요구가 받아들여져 2000년대 초반 정부는 일회용컵 보증금 환불 제도를 도입했다. 상거래가 진행되는 중 컵이나 비닐봉투, 쇼핑백 등에 보증금을 수수하는 단계를 더해 일회용품의 사용량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요컨대 일회용품을 쓰기 불편하게 만들면 아무래도 덜 쓸 것이라는 발상이다.하지만 일회용컵 보증금 규제는 성공하지 못했다. 정부가 강권하니 일선 사업자들이야 어쩔 수 없이 참여해 참여율 자체는 높았지만 정작 일회용컵 사용량은 전혀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사업자 입장에선 매상을 올려준 고마운 고객들에게 괜한 불편만 주는 민망한 상황이 연출됐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컵 보증금은 사실상 버리는 돈이 되고 말았다.뭔가 개혁을 하거나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땐 그게 인간의 삶을 이전보다 더 편리하고 가치 있게 만들어야 지속이 가능하다. 일회용컵 보증금 규제는 인간의 생활을 되레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식으로 뭔가 뜻을 이뤄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애초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2008년 정부는 소비자와 사업자 모두에게 원성이 자자했던 일회용컵 보증금 제도를 폐지했다.일회용품 대신 식기를 씻어 쓰면 환경 보호될까일회용품 사용이 환경에 나쁘다는 인식은 놀랍게도 매우 과장됐다. 음식점에서 식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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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최승노 박사의 시장경제 이야기 (9) 산업혁명은 왜 영국에서 시작됐나?
1739년 프랑스 루이 15세의 궁정에서는 흥미로운 시연회가 열렸다. 자크 드 보캉송이라는 젊은 엔지니어가 만든 기계오리가 그 주인공이었다. 오리의 태엽을 감아 물에 띄웠더니 기계오리가 헤엄을 치고 꽥꽥 소리내 울며 날개를 퍼덕였다. 더구나 실제 오리처럼 물을 마시고 음식물을 소화해 배설까지 할 수 있었다. 물론 소화 과정은 속임수였으며 배설물의 정체는 푸르게 염색한 빵 부스러기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 당시 기계오리 시연회는 파리 전체에서 대단한 이야깃거리였다고 한다.보캉송이 만든 기계들보캉송은 기계오리를 선보이기 전에 이미 북과 피리를 연주하는 실물크기의 기계인형을 발명한 바 있었다. 기계오리처럼 기계인형도 태엽에 감아 작동하는 방식이었는데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손가락과 입술의 들숨과 날숨을 이용해 12곡이 연주됐다고 한다. 그는 이 인형으로 대중 인형극을 만들어 돈방석에 앉았다고 하니 발명솜씨만큼이나 사업수완도 꽤 좋았던 모양이다.국왕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보캉송은 32세의 나이에 왕립 비단공장 관리인으로 승승장구한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인형을 자동화하는 실력을 살려 직조기를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보캉송이 발명한 직조기는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의 직조기보다 무려 24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전성시대는 여기에서 끝나고 말았다.보캉송에게 닥친 비극은 그의 직조기로 인해 일자리를 잃을 걸 걱정했던 수공업 기술자들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비단 길드는 보캉송의 직조기를 불태웠고 그가 기계를 계속 발명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일종의 프랑스판 러다이트 운동인데 시대를 앞서간 천재는 그때부터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