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노 박사의 시장경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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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자선을 베푸는 것보다 자립심을 키워줘야 한다"…국가가 삶을 일일이 챙기려 들면 의존만 강해져
'탈무드'(사진)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어느 마을에 가난한 아이가 부모 없이 혼자 살았다. 아직 어린아이가 할 줄 아는것은 날마다 거리로 나가 지나는 사람에게 손 벌려 구걸하는 일뿐이었다. 아이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리에서 동냥질하여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며 살았다.탈무드 이야기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아이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남자는 아이를 배불리 먹이고 따뜻한 방에서 재웠다. 마치 자신의 아이인 듯 학교까지 보내며 잘 돌봐주었다. 아이는 남자의 도움으로 훌륭한 청년으로 자랐다. 그리고 자신의 가게를 열어 장사하며 큰돈을 모았다.한편 청년을 도와주었던 남자는 집안이 기울며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남자는 고민 끝에 청년을 찾아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청년만큼은 어려운 자신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청년은 매우 냉랭했다. 남자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매몰차게 뒤돌아선 것이다. 남자는 청년이 괘씸했다.“내가 저를 먹여 주고 재워 주며 보살폈건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돈을 주지 않고 장사를 하도록남자는 입술을 깨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남자에게 한 할머니가 찾아왔다. 할머니는 자신의 형편이 어렵다며 자신이 가진 보석을 아주 싼 가격에 사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닌가. 남자는 어리둥절해 하며 헐값에 보석을 샀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남자가 와서 그 보석을 비싼 가격에 사겠다고 하지 뭔가.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보석을 팔았다. 보석을 싼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팔자 이윤이 제법 컸다. 남자는 무릎을 탁 쳤다.“그래, 나도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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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선진국인 청나라를 배우자는 조선의 '국부론'…북학파 지식인으로 기술혁신과 무역 강조했죠
청나라를 무찌르자?잘 알려진 대로 박제가는 서자 출신 지식인이었다. 재주는 뛰어났지만 평생을 서자 신분으로 설움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사실 북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유난히 서자 출신이 많았는데 박제가를 제외하고도 유득공이나 이덕무가 그랬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당대 지식인들이 감히 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주장을 많이 했다.북학이란 북쪽 나라의 학문, 즉 청나라를 배우자는 이야기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그 당시 선진국이었던 청나라를 배우자는 말이 뭐가 파격적이냐고 하겠지만 박제가가 살았던 조선 후기 사회에선 꼭 그렇지도 않았다. 정묘년과 병자년의 전란을 겪은 뒤 조선 지식인 사회에선 반청(反淸) 사상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북학파는 비록 오랑캐라고 할지라도 법과 제도가 우수하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학의》에는 “중국을 배우자”는 표현이 스무 번쯤 반복해 나온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을 지배하던 관념이었던 북벌론에 맞서 북학론을 제시한 것이다. 청나라는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배워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념과 명분에 사로잡혀 나라를 그르칠 게 아니라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내자는 주장이었다.파격적인 주장박제가의 생각은 북학파 중에서도 단연 파격적이었다. 그는 동료 사대부들을 두고 ‘우물 안 개구리’ ‘나라의 좀벌레’라며 힐난했다. 관상감(천문대)을 관리하는 기관 수장을 해당 분야의 지식이 있는 서양인으로 하자는 주장도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기상청장을 외국인으로 쓰자는 격이니 조선 사대부들이 얼마나 어안이 벙벙했을까 싶다.중국 문명에 뒤처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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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북아프리카 사막은 로마시대엔 비옥한 농토였죠…아랍 점령 후 사유재산권 폐지로 황폐화 됐죠"
사막을 가꾸게 한 재산권리비아, 에티오피아, 이집트 등이 자리한 북아프리카는 대표적인 사막 지역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모래 바람이 불고, 풀과 나무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말라 죽는 불모지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금은 바싹 마른 이곳이 로마시대만 해도 비옥한 농토였다고 한다. 우거진 수풀과 기름진 토양은 어디로 가고, 어떻게 부슬부슬 모래 먼지가 흩날리는 사막만 남게 되었을까.일반적으로 사막화는 기후 변화에 따라 진행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북아프리카의 사막화는 잘못된 제도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결과물이라는 쪽이 힘을 얻고 있다. 그 이유는 로마가 북아프리카 지역을 통치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로마와 오스만 제국로마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땅을 일구고, 관개 시설을 마련하여 멀리서부터 물을 끌어다 댔다. 아직까지 이 지역에 남아 있는 로마 시대의 관개 시설은 1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복원할 수 있을 만큼 탄탄하다. 로마인들이 이토록 공들여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던 데에는 사유재산권 인정이 있었다. 로마는 사유재산권을 인정했고, 그 덕분에 로마인은 땅에 대한 재산권 행사가 가능했다. 또한 그만큼 아낌없이 투자하고 관리할 수 있었다.하지만 아랍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로마 이후로 북아프리카 지역을 차지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아랍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통치자는 사유재산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치자에 대한 절대 충성을 강조하며 모든 토지를 국유화했다. 그러자 땅이 급격하게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열심히 땅을 일구거나, 관개 시설을 마련하여 물을 끌어다 대려고 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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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미국 정착한 청교도들 기근 계기로 공동사회 포기…사유재산 인정하자 수확 급증…이후 시장경제 전환
현재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는 명실상부 미국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맹주인 미국마저도 한때 사회주의를 경험한 적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1620년, 청교도 이주민들이 미국에 처음 정착했을 무렵이었다.공동생산을 포기하다당시 이주민들은 개인의 선택을 최소화하고 공동체 중심 생활을 했다. 부의 공유를 지향하고 개인의 소유를 철저히 금지하는 등 모든 재화의 공동관리 원칙을 고수했다. 하지만 청교도 이주민들의 공동체 생활은 3년도 채 되지 않아 무너지고 말았다.결정적인 계기는 기근이었다. 기근 앞에 무너진 청교도 이주민들은 공동사회체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체제로 회귀했다. 하지만 단순히 기근만으로 체제 전환이 이루어졌을까? 당시 이주민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프리머드 개척」이라는 논문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부의 공유를 원칙으로 하는 공동사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비효율적으로 변했으며 사람들 사이에 불만과 혼란을 야기했다고 한다. 아무리 시간과 공을 들여도 돌아오는 결과가 똑같았기 때문에 먼저 열성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자연히 작업의 효율성이 떨어지면서 수확량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는 기근이라는 악재로 돌아왔다. 결국 이주민 지도자들은 굶주림과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낼 결단을 내렸다. 그때까지 고수하던 공동생산과 공동소유라는 공동체적 생활을 과감하게 버리고, 각자 생산한 만큼 소유하는 방식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일은 하지 않고 불평·불만을 하기 바빴던 사람들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부지런히 일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생산성이 올라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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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아버님, 제 배필을 제가 구하도록 해주세요."…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죠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엔 정기룡 장군이 있어 왜구를 막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정기룡 장군은 어려서부터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좋아했고,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할 때는 잘못한 아이에게 군령으로 벌을 내릴 만큼 남다른 비범함이 있었다.정기룡 장군훗날 무과에 급제한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구를 상대로 백전백승의 전적을 올리며 조국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정기룡 장군에게도 뜻밖의 시련이 오고 말았다. 치열했던 진주성 싸움에서 끝내 부인을 잃게 된 것이다. 장군은 가슴이 찢어질 듯 깊은 슬픔에 빠졌지만, 선조 27년 공무를 위해 전주의 권 현감 집에 잠시 머물게 되면서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권 현감에게는 미모와 덕을 겸비한 외동딸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총명함과 선견이 있어 딸에 대한 사랑이 여간하지 않았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권 현감에게도 딸에 대해 심각한 고민거리가 있었다. 딸이 시집 갈 나이가 다 되어 배필을 정해 주려고만 하면, 번번이 시집을 가지 않겠다며 한사코 뜻을 꺾지 않았던 것이다.하루는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한 권 현감이 딸을 불러놓고 시집을 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자 숙연히 듣고 있던 딸은 가만히 입을 열어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결혼 선택권“아버님, 혼사는 인륜대사 중에 대사이온데, 만약 부모님이 정해 주신 배필이 옳은 배필이 아니면 제 평생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님께도 불효가 될 터이니, 제 배필은 제가 구하도록 해주십시오.”권 현감은 공손한 말투 속에 딸의 심지가 굳게 서려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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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은 '기회비용' 있다는 뜻…'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는 속담도 같죠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속담처럼 즐겨 쓰던 표현이 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공짜 점심’은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서 유래됐다. 당시 어느 술집에서는 술을 일정 한도 이상 마 시면 점심식사를 공짜로 제공했다고 한다.밀턴 프리드먼의 공짜 점심얼핏 귀가 솔깃한 공짜 서비스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달랐다. 막상 공짜로 점심밥을 먹으려면 그만큼 술을 많이 마셔야 하고 당연히 술값을 많이 내야 했다. 결국 술집이 제공하는 점심식사의 값이 술값에 포함되는 셈이었다. 여기에 공짜 점심의 함정이 있었다.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떤 것을 얻으려면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기회비용’이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러시아 속담에는 “공짜 치즈는 쥐덫에만 놓여 있다”란 말이 있고, 우리나라 속담에는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는 말이 있다. 이 모두가 숨겨진 비용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공짜처럼 보이지만 숨겨진 비용 이야기는 이솝우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솝우화의 ‘야생나귀와 집 나귀’ 이야기를 살펴보자. 산속에 사는 야생 나귀는 집 나귀를 보고 매우 부러워한다. 자기는 항상 거친 산속에서 무서운 천적에게 쫓기고, 먹이가 부족해 배를 곯기 일쑤인데 집 나귀는 따뜻하고 안전한 집에서 주인이 주는 먹이를 날름날름 받아먹으며 편하게 살기 때문이었다. 야생 나귀가 보기에 집 나귀는 먹이 걱정도, 천적 걱정도 전혀 없이 마냥 행복한 듯했다.야생 나귀와 집 나귀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야생 나귀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됐다. 집 나귀가 커다란 짐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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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100년 동안 지구 평균기온은 0.74도 상승했죠…지구 온도 변화의 주범은 태양…늘 변해 왔어요
“지구온난화로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무심결에 말할 때가 있다. 지구온난화로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말은 과장된 표현이다. 지구 표면 온도와 생태계는 늘 변한다. 변화는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그래서 도태되는 종도 있고 새로운 종도 출현한다.지구온난화는 재앙인가?미세한 수준의 온도 변화는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의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환경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뿐이다. 지난 100년 동안 지구의 평균 기온이 0.74도 상승했다고 한다. 그렇게 큰 변화가 아니며 우리가 적응하고 극복하기에 어려운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다시 빙하기가 온다면 인류에게는 엄청난 재앙이 될 수도 있다.기후 변화는 인류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1000년 전과 비교해보면 지구는 춥다. 장기간 온도가 하락하다 보니 세상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주거 형태가 변했고 심지어 사람들이 따뜻한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문명도 바뀌었다.이런 점에서 기후 변화는 역사를 바꿀 만큼 인류에게 큰 영향력을 갖는다. 예를 든다면 로마제국이 흥한 것도 또 멸망한 것도 온도 변화에 영향을 받았다. 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는 삶의 내용에 상당한 차이를 가져온다. 온난기를 맞아 지중해성 기후가 확대되면서 유럽 대륙은 농산물이 풍족해졌다. 이 시기에 로마는 융성했고 유럽 전역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었다. 반면 5세기에는 날씨가 추워지면서 게르만의 남하가 시작됐고 로마는 재앙을 맞는다.사람들은 지구가 추워지는 것과 따뜻해지는 것 가운데 어떤 쪽을 선택할까? 지구온난화(溫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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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美 옐로스톤 大화재는 환경주의자 때문에 오래 가…자연도 인간이 잘 가꾸고 관리해야 가치 커져요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미국 북서부에 있는 세계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국립공원이다. 공원 크기가 대략 9300만㎢로 남한 면적의 10%쯤 된다니 어마어마하다. 대충 훑어보는 데만 사나흘, 꼼꼼히 보려면 1주일 이상 여행해야 한다. 당연히 걸어서 보는 것은 어림없고 차를 타고 움직여야 한다.최초의 국립공원 옐로스톤옐로스톤은 번역하면 ‘노란 돌’이란 뜻이다. 공원 안의 돌과 바위가 유황 성분이 포함된 물로 인해 노랗게 변한 데 따른 것이다. 물에 유황이 많은 건 옐로스톤이 화산 지대이기 때문이다. 사실 옐로스톤 자체가 지름이 50~70㎞에 달하는 초거대 칼데라 지형 위에 만들어진 공원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옐로스톤 분화구가 폭발하면 전 지구적 재앙이 될 거라고 한다.공원이 크고 이런저런 의미로 대단한 만큼 옐로스톤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공원을 홍보하는 책자엔 예외 없이 “The world first national park”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옐로스톤이 1871년 세계 최초로 지정된 국립공원이란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다.1988년 대화재 초기대응 늦어 진화 실패세계 최초, 최대의 국립공원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는 옐로스톤에도 의외의 시련은 있었다. 1988년에 있었던 옐로스톤 대화재가 대표적이다. 봄 가뭄으로 시작된 산불이 꺼지지 않고 무려 반년 넘게 공원을 태웠다. 불길이 거셀 땐 하루 10㎞ 이상씩 번져 나갔다고 한다.당시 미국 정부라고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산불을 끄려고 2만 명 이상의 진화 요원과 1억달러 이상의 비용을 들였다. 그럼에도 초기 대응이 너무 늦어 진화에 실패했고 그 결과 반년이나 끌게 된 것이다. 산불은 그해 말 첫눈이 내릴 무렵에 가서야 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