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왕과 양반들, 북벌론에도 모화사상 못 벗어나…청나라 요청으로 파병…'나선정벌'로 변질돼

    인조 때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박연)는 귀화해 무기 제조 등에 참여했다. 이어 표착한 동인도회사의 직원 하멜 등도 군기 개발에 참여했고, 효종도 활용했다. 한편 북쪽에서는 몽골의 지배를 벗어난 러시아가 17세기 중반부터 헤이룽강(아무르강) 일대에 진출해 부가가치가 높은 담비 가죽을 비롯한 모피 등의 자원을 획득하고, 식민단을 정착시켜갔다. 청나라도 북진하면서 북만주의 삼림과 헤이룽강 상류의 다구르족, 예벤크족 등 소수 종족과 전투를 벌였다.따라서 헤이룽강 일대에서 청과 러시아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면전은 고사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는 전술적인 공격조차 불가능했다. 더구나 명에서 청으로 바뀌었을 뿐 모화사상은 깊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절대권력을 가진 왕과 양반 사대부라 해도 정치생명과 직결된 모험을 추진했을 가능성은 없다. ‘북벌론’은 명분과 윤리라는 관점에서는 시대의식과 필요한 행위일 수 있지만 실천이 아닌 명분상의 자존심 회복, 정권 안정이라는 내부용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훗날 숙종과 대원군처럼 망상과 백성을 억압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선례를 남겼다.가정해 본다. 만에 하나 북벌론이 추진됐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수많은 백성이 살육되고, 포로로 끌려갔으며, 어쩌면 독립마저 상실하고 청 제국의 일개 성(省)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그런데 역사에서는 때때로 우연이 발생한다.북벌 준비는 ‘나선 정벌’이라는 기묘한 사건으로 변형됐다. 러시아와 전투를 벌이며 패배하던 청나라는 북벌론으로 강해진 조선군의 화포 등 무기 수준을 시험하고,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국제관계 눈뜬 소현세자 급사, 포로·환향녀 냉대…전후에도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갇혀 망국의 길로

    조선 포로들의 속환가가 초기에는 남자 은 5냥, 여자 은 3냥 수준이었다. 하지만 혈육의 정이 남다른 조선 사람들이 선양을 계속 찾아오자 가격은 150냥에서 250냥 정도까지 올랐고, 심지어 한 고위관리는 아들을 위해 1500냥을 지급할 정도였다. 결국 재력 있는 양반 사대부의 포로들은 귀환했지만, 그것도 몇 차례에 걸쳐서 2000여 명에 그쳤다. 그나마 대다수 백성은 돌아오지 못한 채 남자들은 노예로, 여자들은 첩이나 창기로 전락했다. 그 후예들은 청나라 사람, 중국 사람들로 변했다.관광단이나 사업가, 고구려 유적 답사에 나선 학생들은 선양의 청나라 ‘고궁’과 ‘백탑’에서 선조들의 참상을 몰라 숙연함과 반성하는 마음을 갖기보다 웃고 즐긴다. 식민지 백성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역사 교육을 잘못 받은 탓이다.돌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귀환한 포로를 ‘영웅’으로 환영하는 나라는 자주적이고, 성공한 국가다. 조선은 그 반대였다. 8년 만인 1645년 돌아온 소현세자는 선양에서 조선과 청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조선과 포로들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청국의 크기와 위상을 절감하고, 국제관계의 실상에 눈을 떠 몽골어를 공부했다. 또한 청나라에 와 있던 아담 샬을 비롯한 천주교 선교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우수한 서양문물을 배웠다. 더불어 자명종, 천문의, 세계지도 등 부국강병에 필요한 서양물건을 가지고 귀국한 그의 존재는 성리학자들의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정통성에 위협을 느낀 인조의 냉대,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비판과 모함을 받다 결국 2개월 만에 급사했다. 상황과 세자의 시신 상태, 인조의 태도, 당쟁을 고려해 ‘독살설’이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패전 후 조선은 청나라 속방으로 전락…백성 50만명 이상 포로로 끌려가

    이웃한 국가 간은 협력과 우호관계일 때도 있지만 경쟁과 갈등, 불가피한 충돌도 발생한다. 때로는 우리의 선택이나 상대의 의사와 무관하게 국제질서 때문에 충돌하기도 한다. 일부 배신자를 제외하고, 국가 간 충돌에서 패배한 국가의 백성에게는 포로, 노예, 죽음의 길이 기다린다.조선은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을 상실했고, 국가의 존재 이유와 역할을 망각한 성리학자들의 나라였다. 광해군의 정책과 같이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를 외교적으로 이용하면 청나라의 공격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청을 자극해 전면전을 초래했다.청태종의 친정군 12만 명의 선발대가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넘었지만 12일에야 사실을 보고받았던 정부는 무능했다. 더구나 임진왜란의 대참상을 겪고, 정묘호란이 끝난 지 불과 9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몰현실적인 자주론자들의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불과 45일을 버티다 항복했다.승전국과 패전국은 협의 끝에 9개 조항을 만들어 공표했다. 조선은 청나라에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관계를 끊고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인조가 항복의식을 행한 삼전도에는 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이렇게 조선은 명나라 대신 청나라의 속방으로 전락했다. 이 같은 상황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의 조인 때까지 이어졌다.조선의 정책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두 번에 걸친 전쟁으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봤다. 전쟁 기간이 매우 짧았고, 전장이 한반도 북부와 수도권에 한정됐으며 큰 전투가 없었지만 완벽한 패배와 항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임진왜란 참사 후에도 반성·개혁없이 당파싸움만…외교·군사적 대비도 없이 청과 대립하다 굴욕

    명나라에서는 1627년 산시지역을 시작으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나 확산했다. 병자호란 전후 명나라 중심부는 대부분 농민군에 의해 장악되고 정부는 통제 능력을 상실했다. 1636년에 2대 황타이지(皇太極)’는 ‘대청’을 선포하고, 천자를 칭하면서 중국 통일을 목표로 명나라를 외곽 포위해 동서남북으로 팽창했다. 청나라의 배후지라는 지정학적 위치, 적극적인 친명(向明) 세력으로의 변신은 조선을 필수적 공격 대상으로 만들었다. 조선은 친청정책을 추진할 기회를 놓쳤고, 청나라는 준비를 마친 뒤 사신을 파견해 정묘호란 때 맺은 조약의 위반을 비판하고, 형제관계를 넘어 ‘군신의 예’를 요구했다. 분노한 조정은 국서의 수용을 거부했고, 척화론은 더욱 강력해졌다.그런데 명나라의 도움조차 없는 상태에서 조선이 청나라와 전면적인 군사전을 벌이는 건 불가능했다. 반면 늦게라도 외교전을 지혜롭게 펼친다면 전쟁 가능성과 피해는 낮아질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 정부와 사대부들이 끝까지 외교활동을 하지 않고, 군사적 대비도 충분히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본능적인 두려움과 불안한 현실을 감추려는 자기기만일까? 권력과 부에 집착하는 기득권의 속성 때문일까? 아니면 부족한 현장감과 교조적인 성리학자들의 근거 없는 오만함 때문일까? 분명한 사실은 그들에게 백성의 생명과 삶을 지키려는 책임의식이 희박했다는 점이다.나라와 왕이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는 백성의 안전과 행복을 구현하기 위해서다. 정도전은 <조선 경국전>에서 ‘民(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民은 복종하지만, 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고 했다. ‘쌍방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서인 정권의 '향명배금' 정책 고집…국제질서 변화 못읽어 정묘·병자호란 자초

    ‘호란’은 오랑캐(胡)가 일으킨 ‘난’이라는 뜻이다. 오랑캐는 여진족 계열인 올랑개(兀郞介) 부족을 가리키는 용어지만, 성리학자들은 야만인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조선과 청나라(여진족) 사이에 발생한 전쟁은 1627년부터 1637년 초까지 10년간 이어졌고, 1단계 정묘호란(1627년)과 2단계 병자호란(1636~1637년)으로 구성됐다. 전쟁의 배경과 과정, 결과가 한족인 명나라와 여진족(만주)이 주도한 청나라의 흥망에 영향을 미쳤다. 예측과 예방이 가능했지만 저항 없이 항복한 우리 역사에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겨준 전쟁이기도 하다.역사학자 관점에서 조선 시대에는 불가사의하고 수용하기 힘든 사건이 몇 번씩 발생했다. 임진왜란이 그랬고, 뒤를 이은 정묘호란, 특히 불과 9년 뒤 발생한 병자호란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 사건에 책임질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은 용서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조선의 위정자들은 왜 전쟁이 곧 발발할 것을 몰랐을까. 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질서가 재편되고, 정복국가가 탄생할 때는 예외 없이 한국지역을 공격했다. ‘고수 전쟁’ ‘고당 전쟁’ ‘여요 전쟁’ ‘여원 전쟁’ ‘조청 전쟁’ ‘6·25전쟁’이 그러하다. 일본열도의 통일과 전환도 비슷했는데, ‘임진왜란’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일본의 식민지화’ 등이다.그 시대의 상황을 보면 전쟁 발발 예측은 분명했고, 중국에서는 격렬한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우고, 1618년에는 요동지역의 태자하 유역인 무순을 점령하면서 대(對)명 전쟁의 신호탄을 올렸다. 위협을 감지했던 명나라는 파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 아시아 바다 누비며 무역…유럽·남미 순방도, 통신사 정세파악 못해 1875년 일본 군함에 무릎

    조선 도공인 이삼평이 가마를 연 아리다(有田) 자기는 매우 유명해 유럽에서 주문자 생산이 많았고, 독일 등에는 일본 도자기 연구소들이 설립돼 도자기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도자기와 더불어 전파된 전통 그림인 ‘부세화(우키요에)’는 유럽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인상파가 성립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모네, 마네, 고흐 등은 일본 문화에 심취해 작품에 많이 반영했다.일본은 임진왜란을 전후해 중국의 해안가 도시들, 베트남의 호이안, 캄보디아, 샴(태국), 믈라카 해협, 자바섬(자카르타), 루손(마닐라), 타이완 등에 마을을 만들었고, 상관을 설치하면서 무역선을 파견했다. 철, 일본도, 은, 구리, 심지어 서양식을 모방해 제작한 총까지 수출했다. 일부 지역에는 왜구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노예로 끌려간 조선 포로도 있었다. 막부시대에 일본은 네덜란드와 청나라뿐만 아니라 북쪽 지역에 살던 아이누(하이)인들, 남쪽의 유구(오키나와 열도)를 지나 동남아시아 나라들과 활발하게 무역을 벌였고,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대무역망’과도 연결됐다.일본이 이렇게 상업 발달과 무역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룬 데는 내부의 발전도 있었지만 막부의 해양정책이 크게 작용했다. 막부는 쇄국정책을 취했지만, 해양 문화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 특정 상인들에게 외국과 무역할 수 있는 주인장(朱印狀)을 발부했는데, 이 증서를 소지한 ‘주인선’은 일본 배를 근간으로 중국의 장크 스타일에 서양 범선의 특징을 혼합해 만들었다. 조선을 침공했던 선봉장인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는 1604년 약 550t급의 주인선을 건조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통신사 9차례 오간 200년간 일본은 강국으로 변신…막부, 해양력 강화…경제수도 오사카 인구 40만명

    조선은 1636년 일본 막부의 쇼군(장군)에게 ‘통신사(通信使)’란 정식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후 1811년까지 아홉 차례나 파견했다.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이라고 부르며 성리학적 지식을 뽐내던 조선 통신사들이 오간 200년간 일본은 강국으로 변신했다.왜인이라고 경멸하며 눈길을 돌렸던 배타적인 통신사들도 놀라면서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수도였던 오사카는 인구가 4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였다. 상업이 발달해 물자가 풍부하고, 많은 사람이 질서를 지키는 도시였다. 도시는 정비가 잘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도로가 숫돌처럼 반반했고, 상하수도 시설을 갖췄다. 강과 운하에는 ‘무지개 다리’들이 걸려 있었고, 수많은 선박이 오갔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다니는 거리와 수입품을 전시해놓은 시장들, 목욕의 풍습과 변소의 청결함도 경이로운 눈초리로 기록했다.에도(1868년 이후 동경)는 막부의 쇼군이 거주했던 정치수도였다. 고구려 유민과 신라인들이 개척한 동경만 지역의 작은 어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상업과 무역 등을 염두에 두고 건설한 해양도시였다. 발전을 거듭하더니 18세기 초에는 상하수도 설비 등 각종 인프라가 구축됐고, 인구 100만여 명의 세계적 도시로 변모했다. 반면 20세기 초 한양 인구는 25만 명 정도였다.일본은 발달한 수차를 사용했고, 수리시설을 완벽하게 갖춰 따뜻한 기후를 활용해 삼모작을 하고 있었다. 수산업이 발달해 전 해역에서 어로활동이 활발했다. 혼슈 북쪽 아키다, 아모모리 등의 해역에서 잡은 ‘연어’와 ‘다시마’ 등을 실은 상선들이 조선통신사선들이 통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재침략 막기 위해 일본을 살피고 배우기보다 멸시…정약용 등은 통신사 거만한 행적과 과시행태 비판

    조선통신사 행사는 두 나라의 문화가 만나고 충돌하며,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약점을 파악할 절호의 기회였다. 만약 조선이 재침을 방어하고 역습의 기회를 모색한다면, 내정을 샅샅이 탐지하고 해양력을 파악하며 복잡한 해로망까지도 탐지할 기회였다. 물론 ‘시호(승냥이와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듯한 불안감, 종묘사직과 능묘까지 훼손당한 적개심과 오기 등이 가득 찼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들의 잘못과 무력감 때문에 파괴된 나라와 피해 입은 백성들에 대한 도리를 떠올려야 했다.일본은 멸시가 아니라 극복의 대상, 학습의 대상이었지만 정치인이면서 학자였던 조선통신사들은 전쟁의 후유증이 심하고, 청나라에 항복한 굴욕적인 상태에서도 일본을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했다.조선통신사들은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 등으로 지칭하고 일본을 섬오랑캐(島夷), ‘올빼미’라고 불렀다. 하의를 벗고 흑치를 한 풍습을 보면서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다. 또한 성리학에 조예가 부족하고 시문에 서투르다고 무시했다. 실제로 도시에서조차 통신사들의 성리학 지식과 한문 및 서예에 감동하는 일본인이 많았다. 신유한 때는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곤혹스러운 사실이 여러 곳에 기록됐다. 일본의 문물과 제도에 감탄하는 신유한조차 그들의 글이 졸(卒)하고 우습다고 표현했다. 또 1636년에 온 김세렴은 조그만 항구에서 일본의 전선을 관찰한 뒤 일본 전선이 우리 배보다 못하다고 평가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일본의 기술 능력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본 정약용은 통신사들의 거만한 행적과 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