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에 새겨볼 용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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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어느새 한로(寒露·10월 8일)를 지나 상강(霜降·10월 23일)으로 흐르고 있다.

한로니 상강이니 하는 것은 절기를 뜻하는 말이다. ‘절기(節氣)’란 한 해를 스물넷으로 나눈, 계절의 표준이 되는 때를 말한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었던 지난 시절엔 절기를 보고 계절의 바뀜을 알고 농사를 지었다. 그만큼 우리말에서도 놓치면 안 되는 말들이다.

한로는 ‘찰 한(寒), 이슬 로(露)’다. ‘차가운 이슬이 맺힌다’는 뜻이다. 상강은 ‘서리 상(霜), 내릴 강(降)’으로 돼 있다.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다. 적의 침략을 경계하던 말 ‘천고마비’이즈음엔 춥지도 덥지도 않으면서 맑은 날씨가 이어져 나들이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그럴 때 쓰는 말이 천고마비를 비롯해 점입가경이고 청천벽력이다. ‘천고마비(天高馬肥)’는 하늘이 맑아 높푸르게 보이고 온갖 곡식이 익는 가을철을 이르는 말이니 당연히 가을을 나타내기에 좋은 말이다.

그런데 ‘점입가경’이나 ‘청천벽력’은 좀 의외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은 갈수록 하는 짓이나 몰골이 꼴불견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정치권의 이전투구가 점입가경이다” 같은 소리를 자주 듣는다. 청천벽력(靑天霹靂) 역시 뜻밖에 일어난 큰 변고나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이냐”처럼 쓰인다. 둘 다 부정적 현상을 가리킨다.

천고마비와 점입가경, 청천벽력. 우리말에 뿌리내린 이 말들은 다 중국의 고사에서 온 말이다. 다른 공통점도 있다. 우리말에 들어와 본래 의미에서 변형된, 새로운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는 점이다.

우선 ‘천고마비’의 태생은 중국 《한서(漢書)》의 ‘흉노전(匈奴傳)’이다. 흉노족은 만리장성 넘어 북방에서 수렵생활을 하며 침략질을 일삼던 유목민족이었다. 이들은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해 가을이면 날쌔고 살찐 말을 타고 중국 변방을 쳐들어와 가축과 곡식을 약탈해 갔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가을철이면 늘 흉노족의 침략을 경계했는데, 이를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가을이 깊어가니 변방의 말이 살찐다)’라고 했다.

이 말을 일본에서 받아들이면서 자기네는 섬나라인지라 북방 오랑캐의 침범을 겁낼 까닭이 없으니 ‘새(塞)’를 빼고 ‘추(秋)’를 ‘천(天)’으로 고쳐 ‘천고마비’라 해 가을철을 수식하는 말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 ‘천고마비’는 단순히 청명한 가을을 상징하는 말 이전에 적의 외침과 그에 대한 경계심을 깨우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우리말의 속살인 셈이다. 긍정에서 부정의 의미로 ‘점입가경·청천벽력’점입가경은 ‘차차 점(漸), 들 입(入), 아름다울 가(佳), 지경 경(境)’, 직역하면 ‘갈수록 더 좋거나 재미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중국 동진(東晉)의 화가였던 고개지에서 유래한 사자성어다. 그는 사탕수수를 먹을 때 항상 뿌리에서 먼 데서부터 씹어먹었다고 한다. 그 이유를 그는 “갈수록 단맛이 강해지기 때문(漸入佳境)”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경치나 문장, 또는 어떤 상황이 갈수록 재밌어지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하지만 요즘 이 말은 본래 뜻을 거의 잃고, ‘시간이 지날수록 하는 짓이나 몰골이 더욱 꼴불견임’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쓰임새가 부정적 의미로 완전히 바뀐 셈이다.

‘청천하늘’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본래 긍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우리말에서 부정적 쓰임새로 바뀌어 자리잡았다. ‘청천(靑天)’은 맑게 갠 하늘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에 ‘벽력(霹靂)’, 즉 벼락이 붙었다. 맑은 하늘에 벼락이니 곧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이 말은 중국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방옹이 병으로 가을을 지내고(放翁病過秋), 홀연히 일어나 취하여 글을 쓰니(忽起作醉墨), 정히 오래 움츠렸던 용과 같이(正如久蟄龍), 푸른 하늘에 벼락을 치네(靑天飛霹靂).”(두산백과) 방옹은 육유의 호(號)이다. 마지막 연에 ‘청천벽력’이 나온다. 병마에 허덕이던 그가 어느날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붓을 쳤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붓놀림이 웅장하게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말로 ‘청천벽력’을 썼다. 이 말이 세월이 흘러 우리말에서 ‘뜻밖의 큰 변’을 가리키는 부정적 의미로 바뀌어 쓰이고 있는 셈이다.

우리말의 변천과 깊이에 새삼 놀라게 된다.
깊어가는 가을에 새겨볼 용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