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효율성’ 높여야 우리말 강해져우리말에서 ‘언어의 경제성’이란 점에서 대표적으로 비효율적인 표기가 영문약어 쓰는 법이다. 요즘 매일같이 마주하는 인공지능(AI)을 비롯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통화기금(IMF), 국내총생산(GDP) 같은 게 그런 것이다.
이런 영문약어를 ‘이니셜’이라고 한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나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유니세프(UNICEF·국제연합아동기금), 피파(FIFA·국제축구연맹), 나사(NASA·미국항공우주국)처럼 단어처럼 읽는 말도 있다. 이런 영문약어는 ‘애크로님’이다.
이들은 우리말 안에서도 꽤 익숙하다. 이들이 비효율적 표기인 까닭은 우리 글자와 함께 영문약어를 병행해 적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두 번 잇따라 적는 것이다. 그것이 오랜 관행적 표기 방식이다. 심지어 세 개를 적는 경우도 많다. Fed 같은 게 대표적이다. 대개는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식으로 적는다. 그래야 뒤에서 ‘연준’으로 받든 Fed로 받든 할 수 있으니 일단 세 가지를 다 적는 것이다.
‘국제연합-UN’ 대신 ‘유엔’ 많이 써이 중 ‘피파’를 비롯한 대부분의 애크로님은 우리말로 뿌리 내릴 여지가 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나토, 에이즈, 아세안, 유니세프, 나사, 이메일, 이커머스’ 등이 그런 후보들이다. 이들은 영문약자와 우리말 번역어를 덧붙이지 않고 한글로 전사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유형의 표기 중 고전적인 형태로는 ‘유엔(UN·국제연합)’을 꼽을 수 있다. 이 말도 처음엔 3중 표기의 과정을 거쳤다. 지금은 ‘유엔’으로 수렴돼 가는 중이다. ‘UN’은 우리 문자가 아니라서, ‘국제연합’은 글자가 길어져서 언중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지금은 ‘유엔’ 자체가 널리 알려져 한글 전사만으로도 소통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언어의 자유시장’에서 말·글 간 세력다툼을 통해 걸러진 결과다. ‘에이즈’와 ‘유니세프’도 일찌감치 이런 형태로 우리말 안에서 뿌리를 내렸다.
‘유니세프(UNICEF)’ 역시 요즘 영문약어나 ‘국제연합아동기금’을 쓰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영문약어를 단어로 읽은 ‘유니세프’가 단독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메일’도 처음 나왔을 때는 언론에서 주로 ‘e메일’로 적었다. 차마 ‘mail’까지 영자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 ‘electronic’의 첫 글자인 e만 따오고 나머지는 한글로 전사했다. 곧 이어 정부에서 ‘전자우편’이란 대체어를 제시해 한동안 세력다툼을 벌였으나 ‘이메일’의 벽을 넘지 못했다. 지금은 ‘전자우편’은 세력이 미미해져 쓰는 사람이 거의 없고 대부분 ‘이메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언중의 선택은 ‘전자우편’ 아닌 ‘이메일’‘이커머스-전자상거래’ 간 세력다툼도 주목된다. 이커머스도 초기에는 e커머스와 함께 쓰이다가 지금은 ‘이커머스’로 한글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이 여전히 ‘전자상거래’와 경합 중이지만 언중의 쓰임새는 자연스럽게 ‘이커머스’로 넘어가고 있는 듯하다.
‘나토’나 ‘피파’도 그런 흐름을 타고 있다. 이를 NATO, FIFA로도 많이 쓴다. 하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나 ‘국제축구연맹’이란 우리말 명칭은 잘 쓰이지 않는다. 글자가 길어 언어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의 자유시장’에서 세력 다툼을 벌인 결과다.
‘유엔’과 ‘이메일’ ‘아세안’ 등이 우리말에서 자리를 잡은 데는 기본적으로 영어라는 언어적 배경에 힘입은 바 컸겠지만 국제통용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들이 단어로 뿌리를 내리면 그만큼 우리말 사용의 효율성이 높아진다. 영문약어와 번역어를 덧붙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피파를 비롯해 나토, 나사, 아세안, 이메일처럼 한글로 옮겨 적은 말을 적극 사용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