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보조금 장벽 높이는 서방과 자유화에 나선 신흥국
탈세계화 아닌 공급망 재편 … ‘세계화 2.0’ 시대 진입
탈세계화 아닌 공급망 재편 … ‘세계화 2.0’ 시대 진입
‘세계화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 지 꽤 됐습니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 갈등, 중국에 대한 미국의 첨단기술 통제가 본격화한 게 계기였죠. 작년 세계 경제에 충격을 던진 미국의 관세 인상 시도는 보호무역주의의 재등장을 알리며 이런 인식을 더욱 공고하게 했습니다.
자유무역은 1990년대 이후 많은 나라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긴 가치였습니다. 자유무역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나라 경제의 발전이나 국부의 확대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범위도 비단 상품과 금융에 한정되지 않고 기술과 저작권, 노동력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넓어졌습니다. 무역자유화는 세계화와 동의어입니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세계화의 물결에 어느 순간 의문부호가 달리기 시작한 겁니다.
막 내린 세계화…이후엔?
한국경제신문은 최근 ‘뒤집힌 세계화…닫는 선진국, 여는 개도국’이란 기획기사를 실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세계화가 종언을 고하는 듯하면서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역할이 뒤바뀌는 새로운 양상(role change)이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일단 선진국은 관세를 올리고 자국 산업에 보조금을 쏟아붓고 외국인 투자를 막으려고 심사를 강화합니다. 중국 등의 산업 보조금이 문제 있다며 제동을 걸던 선진국이 이제는 자기 나라 기업에 보란 듯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진 보호무역주의의 회귀가 맞습니다.
그런데 개발도상국(이하 신흥국)들은 정반대 모습입니다. 자유무역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선진국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세계화는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 개도국의 공장과 노동력이 결합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이 세계에서 3번째로 해외직접투자를 많이 하는 나라가 됐고, 한국과 대만 기업은 미국에다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2020~2025년 세계 반도체 그린필드(현지 설립 투자) 투자액 중 대만 기업의 비중은 45%, 한국은 10%에 달했습니다. 이런 투자가 향한 대표적인 곳은 미국으로, 전체의 47%를 차지했습니다. 국제 투자자금이 신흥국에서 선진국으로 거꾸로 흐르고 있는 겁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최근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세계 경제에서 놀라운 역할 역전이 이뤄지고 있다”며 “민족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향한 서방 강대국의 추파가 노골화하는 사이 많은 신흥국은 성장에 불을 붙이기 위해 오랫동안 검증된 자유화와 민영화 정석을 따르기 시작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는 ‘뒤집힌 세계화’의 원인을 한마디로 짚은 건데요, 어떤 속사정(배경)이 있는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경제 통합되면 내부는 분열”
먼저 선진국의 경우, 세계화 가속으로 국내 정치의 어려움이 가중됐습니다. 상품 교역과 자본 이동이 자유화하면 세계 각국은 저임금 국가의 노동력, 24시간 이동하는 국제 금융자본과 경쟁하기 위해 노동시장 유연화, 규제 완화, 법인세 인하 등 친기업 환경 조성에 노력해야 합니다. 선진국은 이런 시스템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자국 내 노동자와 소득계층, 지역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심각한 사회 양극화와 갈등 문제를 부릅니다. 다시 문을 걸어 잠그는 선택 외에 달리 대안이 없었던 겁니다.
세계화의 명과 암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분석한 다니 로드릭 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국제정치경제학 교수는 이에 대해 “경제가 서로 더 통합될수록 내부적으론 더 분열됐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1990년대 세계무역기구(WTO)가 중심이 된 세계화는 애초에 지속가능한 체제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를 ‘하이퍼 글로벌라이제이션(Hyper-Globalization, 초세계화)’이라고 이름 붙였는데요, 지금은 이를 되돌리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음으론 세계 패권 경쟁이 지경학적 분절화(Geoeconomic fragmentation)를 가져왔고, 이게 세계화 진전에 급제동을 걸었다는 분석입니다. 조금 어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지경학적 분절화는 ‘산업의 공급망 재편’과 같은 뜻입니다. 즉,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하면서 반도체, 인공지능(AI) 산업을 중심으로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을 다시 짜려는 미국의 전략이 본격화했고,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던 세계화는 역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난 4월 세계경제전망 보고서는 흥미로운 분석을 담았습니다. 세계화 속도가 늦춰지면서 다극화하고 있는 세계가 반드시 더 분리·고립되는 세계는 아니며, 각국이 지정학적 진영을 넘어 새로운 무역 파트너를 찾고 협정을 맺는 양상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탈세계화’ 보다는 ‘재배치(rewiring)’라고 봅니다.
성장 절박한 신흥국의 선택 ‘개방과 자유화’
그렇다면 신흥국들은 왜 개방과 세계화 쪽으로 기울고 있을까요? 먼저, 신흥국은 자신의 국내 수요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습니다. 선진국이 관세 장벽을 세우고 투자 심사를 강화한다면 신흥국은 다른 성장엔진을 어떻게든 찾아야 합니다. 신흥국 간 교역이라도 늘려야 합니다. 실제로 신흥국 간의 교역은 1995년 5000억달러에 불과했지만 작년 6조8000억달러로 급증하며 세계 교역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또 국제 투자자금을 유치하려면 자국이 예전보다 안전하고 개방적이며 규제가 예측 가능하다는 시그널을 시장에 보내야 합니다. 국영기업의 비효율성, 불투명한 기업 규제, 외환 통제 등의 이미지를 벗고 민영화와 개방, 자유화의 모습을 보여야 글로벌 자본을 유치할 수 있죠. 선진국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있지만, 우리(신흥국)라도 문을 열어야 투자와 성장을 붙잡을 수 있다는 절박함이 뒤집힌 세계화를 만들고 있는 겁니다.
탈세계화든 재배치든, 혹은 지속가능한 세계화로의 복귀든 분열되는 세계에선 경제의 파이가 줄어들게 됩니다. 지난 4월 IMF는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1%로 낮추며 더 길거나 광범위한 분쟁, 심화하는 지정학적 분절화, 무역긴장 재점화 등이 성장을 크게 훼손하고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순수 경제학 관점에서 세계화의 퇴조는 글로벌 자원배분의 비효율성을 높입니다. 비교 우위가 아니라 안보 논리로 투자를 하게 되면 진영별로 반도체, 배터리 등 같은 산업 분야에 중복해 투자하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장의 고용과 국내총생산(GDP)에 도움이 되겠지만, 세계 전체로 보면 자원이 낭비되고 물가상승 압력이 커질 위험이 다분합니다. 마지막으로 WTO의 권위와 역할이 땅에 떨어지면서 무역분쟁이 생겨도 각국의 개별 협상력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신흥국과 약소국엔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국인 거죠.
세계화 ‘무게중심 이동’ 아닐까?
이런 우울한 얘기 속에서도 희망 섞인 전망을 해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도 1차 세계대전 이전인 1870~1914년 세계화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자본·노동 이동의 활성화, 낮은 관세 등으로 이른바 ‘1차 세계화’가 이뤄졌습니다. 이 질서는 이후 1차 대전과 대공황, 미국 보호무역 입법(스무트-홀리법) 속에서 급속히 붕괴했고, 세계 무역이 이전 수준을 회복하는 데 약 반세기가 걸렸습니다.
지금은 미·중의 경제 상호의존, 패권국 간 협력이 20세기 초 세계열강들보다는 긴밀한 상황입니다. 또한 선진국이 문을 닫는 대신 신흥국이 문을 더 열고 있어 세계화 체제가 붕괴할 위험은 줄고 있습니다. 그래서 탈세계화라기보다는 위에서 말한 재배치, 또는 재편되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세계화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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