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관의 인문 논술 강의노트

인문논술을 위한 독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편
[2027학년도 논술길잡이] '포용이냐 착취냐' 국가와 제도의 본질
단순히 교과서나 문제집 말고, 한 권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적이 언제인가요? 논술은 단기간의 기술 훈련으로 실력이 느는 과목이 아니에요. 독서를 통해 쌓인 사고의 깊이와 넓이가 곧 논술 실력입니다. 특히 인문논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권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좋은 정치 제도란 어떤 것인가-이런 질문들은 논술 지문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정치 소식,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논쟁,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국가와 제도’라는 하나의 큰 주제로 이어져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어볼 책은 경제학자 다론 아제모을루와 정치학자 제임스 로빈슨이 공동 집필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입니다. “왜 어떤 나라는 부유하고 어떤 나라는 가난한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해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하는 책으로, 두 저자는 이 연구로 2024년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제도란 무엇이고, 왜 제도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걸까요? 그리고 ‘좋은 제도’는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유지되며, 또 어떻게 무너지는 걸까요?

책의 가장 중심적인 개념은 포용적 제도(inclusive institutions)와 착취적 제도(extractive institutions)의 구분입니다. 이는 어떤 사회가 번영을 지속할 수 있느냐, 서서히 쇠락할 수밖에 없느냐를 가르는 분기점입니다.

포용적 제도란 경제적으로는 사유재산권이 보장되고 공정한 경쟁과 혁신이 장려되는 시스템을, 정치적으로는 권력이 분산되고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며 시민이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저자들은 양 측면이 서로를 강화하면서 선순환을 만들어낸다고 봅니다. 반면 착취적 제도 아래에서는 소수 엘리트가 경제적·정치적 자원을 독점합니다. 일시적으로 성장할 수 있지만, 결국 혁신의 동력이 꺼지고 부패가 만연하며 체제가 붕괴합니다. 이것이 저자들이 말하는 악순환입니다.

이 구분은 추상적 이론에 그치지 않습니다. 책에는 수십 개 국가의 역사적 사례가 등장하는데, 그중 영국의 ‘블랙법(Black Act)’ 사건과 미국의 ‘트러스트 규제’ 역사는 선순환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선순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18세기 초 영국 윈저성 주변 숲에는 밤마다 얼굴을 검게 칠한 정체불명의 무리가 출몰했습니다. 귀족의 사슴을 밀렵하고 재산을 파괴하는 이들을 이 책에선 ‘블랙(Blacks)’이라 부릅니다. 이들의 행동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권력을 남용하는 엘리트층을 향한 평민의 조직적 저항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정치를 장악한 휘그(Whig)당은 명예혁명(1688)으로 절대왕권을 무너뜨렸지만, 권력을 잡은 뒤에는 스스로 기득권이 되어 평민의 전통적 권리를 침해했습니다. 로버트 월폴 경은 공유지에서 주민의 방목권과 사냥권을 제한했고, 윌리엄 캐도건 장군은 인근 주민의 공유지를 빼앗아 사슴 사냥터를 조성했습니다. ‘블랙 행위’는 이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휘그 정부는 1723년 블랙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얼굴을 검게 칠하는 것만으로도 교수형에 처할 수 있는 가혹한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흥미로운 전환점을 맞습니다. 1724년, 블랙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재판받은 존 헌트리지가 무죄판결을 받습니다. 배심원단은 증거 수집 방식의 부정함을 이유로 월폴 편이 아닌 법의 원칙 편에 섰습니다.

“이제는 휘그당 역시 법이 선택적으로나 자의적으로 적용되어선 안 되며 그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법치주의를 따라야 했다.”(<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제11장)

명예혁명은 단순히 한 엘리트가 다른 엘리트를 교체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다원주의를 낳았고, 다원주의는 법치주의를 태동시켰습니다. 법치주의가 자리를 잡자 권력자도 자신이 만든 규칙에 구속되었습니다. 휘그 엘리트들은 법치를 무너뜨릴 유인이 없었고, 그 결과 법치는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이것이 선(善)순환의 출발점이었습니다.민주주의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선순환은 제도를 지속시킬 뿐 아니라, 더 포용적인 방향으로 확장하는 동력을 만들어냅니다. 법치주의가 확립되자 평민은 묻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는 법 앞에 평등하면서 정치에서는 평등하지 않은가?” 19세기 초 러다이트 운동, 피털루 학살, 차티스트 운동으로 이어지는 사회 불안 속에서 영국 엘리트층은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탄압이냐, 타협이냐.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죠. 선순환이 엘리트들에게조차 포용을 ‘유일한 합리적 선택’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영국은 이후 1832년 제1차 선거법 개정을 시작으로 수십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를 확장해나갔습니다.다원주의의 뿌리남북전쟁 이후 미국에서는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같은 거대 독점 트러스트들이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자유로운 시장이 있다고 해서 포용적 제도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미국의 경험이 증명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다원주의적 정치제도는 이에 응답했습니다. 농민운동과 머크레이커 언론인들의 폭로가 여론을 움직였고, 셔먼 반(反)트러스트법 제정과 스탠더드 오일 해체로 이어졌습니다. 포용적 정치제도가 포용적 경제제도를 지켜낸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논리가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1937년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딜정책에 제동을 거는 대법원을 무력화하기 위해 신임 법관 6명을 임명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압도적 지지율의 대통령이었지만, 미 의회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대통령이 사법부를 장악하면 다음 권력자가 입법부도 같은 방식으로 압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원주의는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하는 균형입니다.

반면 아르헨티나의 페론 대통령은 같은 시도를 성공시켰습니다. 대법관을 탄핵하고 자신의 사람으로 채웠으며, 이후 아르헨티나에서는 대통령이 대법관을 교체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차이는 단 하나, 다원주의 뿌리의 깊이였습니다. 착취적 제도 아래에서는 권력을 장악해 얻는 이득이 위험을 압도하기 때문에, 권력을 잡은 자는 반드시 제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려 합니다. 악순환은 이렇게 작동합니다.

이처럼 국가는 지도자 한 명의 능력으로 성공하거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어떤 제도를 선택하고 그것을 얼마나 굳건히 지켜내느냐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포용적 제도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영국의 차티스트들이 투표권을 위해 거리에 섰을 때, 아이다 타벨이 록펠러의 독점을 파헤쳤을 때, 헌트리지 사건의 배심원들이 권력자의 압력에도 무죄를 선언했을 때 — 그 모든 순간이 포용적 제도를 만들고 지켜온 역사입니다. 선순환은 마법이 아닙니다. 다원주의를 요구하는 시민, 법치주의를 지켜내는 사람들, 권력의 남용을 고발하는 언론이 함께 만들어내는 집단적 성취입니다.

임재관 
대치 한걸음 입시논술 원장
임재관 대치 한걸음 입시논술 원장
논술 시험장에서 ‘국가’를 주제로 한 지문을 만났을 때, 단순히 개념을 암기한 학생이 아니라 이 질문들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으로서 답을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도란 무엇인가, 권력은 어떻게 견제되어야 하는가, 그 제도를 지키는 것은 결국 누구인가. 그 답은 역사 속에도,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 안에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