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냄새
가을비가 내리는 날, 특유의 냄새가 코를 스친다. 서늘한 공기 속에 섞인 흙냄새와 풋풋한 풀냄새는 오묘하게 어우러져 마음을 한층 상쾌하게 만든다. 과학자들은 이 비 냄새를 ‘페트리코(petrichor)’라고 부른다. 그리스어로 돌을 뜻하는 ‘페트로스(petros)’와 신들의 피를 의미하는 ‘이코르(ichor)’를 합친 말로, 돌에서 나온 미세한 본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방선균은 주로 토양에 존재하며 죽은 식물체를 분해하는 역할을 하는 세균(박테리아)이다. 이들은 토양 속 유기물을 분해하며 에너지를 얻는 과정에서 여러 화학반응과 효소작용을 거쳐 ‘지오스민(Geosmin)’과 ‘2-메틸이소보르네올(2-MIB)’이라는 냄새 분자를 만들어낸다. 쉽게 말해 방선균은 식물 잔해 속 물질을 분해하면서 그 부산물로 특유의 향을 내는 화합물을 합성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아이소프레노이드’라는 탄소 뼈대가 단계적으로 연결되는 화학반응을 거치며, 효소가 이 구조를 구부리거나 작은 메틸기를 붙여 비 냄새의 핵심 성분을 완성한다.
이 화합물은 땅속 박테리아가 죽거나 손상되면서 세포 밖으로 방출돼 흙 속에 남아 있다가, 비가 내릴 때 빗방울이 지면에 충격을 가하면서 미세한 물방울과 함께 공기 중으로 퍼져나간다. 이를 ‘에어로졸 현상’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빗방울이 튀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작은 입자에 지오스민과 2-MIB가 녹아 공기 중으로 확산한다. 우리 후각은 이 미세한 화학물질을 감지하며 ‘비 냄새’라는 감각 경험을 만들어내게 된다. 비가 오랜만에 내리면 이 냄새 물질이 땅속에 쌓여 있다가 처음 내리는 빗방울과 함께 한꺼번에 퍼지면서 냄새가 더욱더 강하게 느껴진다.
최근 한 연구에서 독일 연구팀은 인간이 지오스민 냄새를 감지하는 후각 수용체가 ‘OR11A1’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연구팀은 616종의 인간 후각 수용체를 실험했는데, 이 중 오직 OR11A1만이 지오스민에 반응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처럼 강한 냄새는 생태계 내 동물들에게도 의미 있는 신호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후각이 예민한 낙타는 사막에서 수십 km 떨어진 오아시스를 찾을 때 지오스민 냄새를 감지해 방향을 결정한다. 모기 또한 알을 낳을 수 있는 습지나 웅덩이를 찾는 데 이 냄새를 이용하며, 너구리 같은 동물은 거북이알의 위치를 찾을 때 후각에 의존한다. 이처럼 지오스민과 같은 냄새 물질은 생물들이 환경 정보를 인식하고 행동을 조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연은 냄새를 통해 생물 간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자연에서 나는 냄새는 미생물과 유기물뿐 아니라 식물이 방출하는 휘발성 유기화합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숲속 향기’로 잘 알려진 피톤치드는 식물이 자신을 해충, 곰팡이, 박테리아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공기 중으로 내뿜는 화합물의 총칭이다. 피톤치드는 주로 소나무·편백나무·오크 등 산림의 다양한 나무에서 생성되며, 숲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상쾌하고 건강한 향기의 주된 원천이다. 연구에 따르면 피톤치드는 항균 효과뿐 아니라 스트레스 완화와 면역력 증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자연 냄새는 바닷가에서 맡을 수 있는 ‘바다 냄새’다. 이 냄새는 해양 미생물과 해조류가 배출하는 화합물, 그중 특히 디메틸설파이드(DMS) 같은 유황 화합물이 공기 중에 퍼지면서 발생한다. 이처럼 자연에서 나는 이러한 특유의 냄새는 향수 산업에도 큰 영감을 준다. 향수 조향사들은 지오스민과 비슷한 화합물을 활용해 ‘비 냄새’를 인공적으로 재현하며, 사람들에게 자연의 향을 전달하고 있다.
한편 비 냄새가 항상 반갑지만은 않다. 특히 식수에서 이 냄새가 난다면 불쾌감을 넘어 위생적인 우려를 낳을 수 있다. 2-MIB는 방선균뿐 아니라 시아노박테리아(남조류) 같은 미생물에서도 생성되며, 지오스민과 달리 ‘습기 찬 지하실’이나 ‘썩은 흙’ 냄새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물이나 음식에서 2-MIB가 존재하면, 사람들은 흔히 ‘물에서 곰팡이 냄새가 난다’고 느끼게 된다.
이에 최근에는 2-MIB를 감지하고 제거하는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활성탄 필터를 이용해 냄새 분자를 흡착하거나, 광촉매 처리를 통해 화학적으로 분해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특정 미생물 균주를 조절해 물이나 식품 속 냄새 발생 자체를 줄이는 방법도 개발 중이다.√ 기억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