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냄새
가을비가 내리는 날, 특유의 냄새가 코를 스친다. 서늘한 공기 속에 섞인 흙냄새와 풋풋한 풀냄새는 오묘하게 어우러져 마음을 한층 상쾌하게 만든다. 과학자들은 이 비 냄새를 ‘페트리코(petrichor)’라고 부른다. 그리스어로 돌을 뜻하는 ‘페트로스(petros)’와 신들의 피를 의미하는 ‘이코르(ichor)’를 합친 말로, 돌에서 나온 미세한 본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비 냄새는 토양 속 미생물, 특히 방선균이 유기물을 분해해 만든 화합물에서 비롯된다. /Pixabay
비 냄새는 토양 속 미생물, 특히 방선균이 유기물을 분해해 만든 화합물에서 비롯된다. /Pixabay
비 냄새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과 미생물 활동의 결과다. 마른 땅이 비로 젖을 때 땅속 미생물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유기화합물이 공기 중에 퍼지면서 우리가 느끼는 ‘비 냄새’가 발생하는 것이다. 흙 속에는 수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스트렙토미세스(Streptomyces) 등 방선균의 활동이 비가 온 뒤 현저히 활발해진다.

방선균은 주로 토양에 존재하며 죽은 식물체를 분해하는 역할을 하는 세균(박테리아)이다. 이들은 토양 속 유기물을 분해하며 에너지를 얻는 과정에서 여러 화학반응과 효소작용을 거쳐 ‘지오스민(Geosmin)’과 ‘2-메틸이소보르네올(2-MIB)’이라는 냄새 분자를 만들어낸다. 쉽게 말해 방선균은 식물 잔해 속 물질을 분해하면서 그 부산물로 특유의 향을 내는 화합물을 합성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아이소프레노이드’라는 탄소 뼈대가 단계적으로 연결되는 화학반응을 거치며, 효소가 이 구조를 구부리거나 작은 메틸기를 붙여 비 냄새의 핵심 성분을 완성한다.

이 화합물은 땅속 박테리아가 죽거나 손상되면서 세포 밖으로 방출돼 흙 속에 남아 있다가, 비가 내릴 때 빗방울이 지면에 충격을 가하면서 미세한 물방울과 함께 공기 중으로 퍼져나간다. 이를 ‘에어로졸 현상’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빗방울이 튀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작은 입자에 지오스민과 2-MIB가 녹아 공기 중으로 확산한다. 우리 후각은 이 미세한 화학물질을 감지하며 ‘비 냄새’라는 감각 경험을 만들어내게 된다. 비가 오랜만에 내리면 이 냄새 물질이 땅속에 쌓여 있다가 처음 내리는 빗방울과 함께 한꺼번에 퍼지면서 냄새가 더욱더 강하게 느껴진다.

최근 한 연구에서 독일 연구팀은 인간이 지오스민 냄새를 감지하는 후각 수용체가 ‘OR11A1’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연구팀은 616종의 인간 후각 수용체를 실험했는데, 이 중 오직 OR11A1만이 지오스민에 반응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처럼 강한 냄새는 생태계 내 동물들에게도 의미 있는 신호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후각이 예민한 낙타는 사막에서 수십 km 떨어진 오아시스를 찾을 때 지오스민 냄새를 감지해 방향을 결정한다. 모기 또한 알을 낳을 수 있는 습지나 웅덩이를 찾는 데 이 냄새를 이용하며, 너구리 같은 동물은 거북이알의 위치를 찾을 때 후각에 의존한다. 이처럼 지오스민과 같은 냄새 물질은 생물들이 환경 정보를 인식하고 행동을 조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연은 냄새를 통해 생물 간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자연에서 나는 냄새는 미생물과 유기물뿐 아니라 식물이 방출하는 휘발성 유기화합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숲속 향기’로 잘 알려진 피톤치드는 식물이 자신을 해충, 곰팡이, 박테리아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공기 중으로 내뿜는 화합물의 총칭이다. 피톤치드는 주로 소나무·편백나무·오크 등 산림의 다양한 나무에서 생성되며, 숲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상쾌하고 건강한 향기의 주된 원천이다. 연구에 따르면 피톤치드는 항균 효과뿐 아니라 스트레스 완화와 면역력 증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자연 냄새는 바닷가에서 맡을 수 있는 ‘바다 냄새’다. 이 냄새는 해양 미생물과 해조류가 배출하는 화합물, 그중 특히 디메틸설파이드(DMS) 같은 유황 화합물이 공기 중에 퍼지면서 발생한다. 이처럼 자연에서 나는 이러한 특유의 냄새는 향수 산업에도 큰 영감을 준다. 향수 조향사들은 지오스민과 비슷한 화합물을 활용해 ‘비 냄새’를 인공적으로 재현하며, 사람들에게 자연의 향을 전달하고 있다.

한편 비 냄새가 항상 반갑지만은 않다. 특히 식수에서 이 냄새가 난다면 불쾌감을 넘어 위생적인 우려를 낳을 수 있다. 2-MIB는 방선균뿐 아니라 시아노박테리아(남조류) 같은 미생물에서도 생성되며, 지오스민과 달리 ‘습기 찬 지하실’이나 ‘썩은 흙’ 냄새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물이나 음식에서 2-MIB가 존재하면, 사람들은 흔히 ‘물에서 곰팡이 냄새가 난다’고 느끼게 된다.

이에 최근에는 2-MIB를 감지하고 제거하는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활성탄 필터를 이용해 냄새 분자를 흡착하거나, 광촉매 처리를 통해 화학적으로 분해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특정 미생물 균주를 조절해 물이나 식품 속 냄새 발생 자체를 줄이는 방법도 개발 중이다.√ 기억해주세요
조혜인
과학칼럼니스트
조혜인 과학칼럼니스트
비 냄새는 토양 속 미생물, 특히 방선균이 유기물을 분해해 만든 화합물에서 비롯된다. 이 과정에서 지오스민과 2-MIB 같은 특유의 냄새 분자가 만들어진다. 비가 내릴 때 빗방울이 지면을 때리면 이 화합물이 공기 중으로 퍼지고, 우리의 후각이 이를 감지하면서 ‘비 냄새’를 느끼게 된다. 오랜 가뭄 뒤 첫비가 내릴 때 냄새가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