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노화 지도 완성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이는 사회 활동에 제약이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지만, 최근 생물학적으로도 의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9월 호주 모나시대와 덴마크 제약 기업 노보노디스크 등이 참여한 국제 공동연구팀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 장기는 사람의 나이와 상관없이 저마다의 속도로 늙는다. 즉 노화 관점에서 보면 장기마다 다른 나이를 지니는 것이다.
최근 인류 역사상 가장 정밀한 노화 지도가 완성됐다. 이 지도는 노화의 비밀을 밝혀낼 뿐 아니라, 노화 조기 예방 및 치료에도 활용 가능해 의미가 더 크다. /이미지는 생성형 AI로 제작
최근 인류 역사상 가장 정밀한 노화 지도가 완성됐다. 이 지도는 노화의 비밀을 밝혀낼 뿐 아니라, 노화 조기 예방 및 치료에도 활용 가능해 의미가 더 크다. /이미지는 생성형 AI로 제작
연구팀은 각 장기의 노화 정도를 알아내기 위해 ‘DNA 메틸화’에 주목했다. 모든 세포에는 일종의 설계도인 DNA가 존재한다. DNA는 늘 똑같이 발현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어떤 유전자는 켜지고 어떤 유전자는 꺼지며 세포를 정상적으로 작동시킨다. 이때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DNA 메틸화다. DNA의 특정 위치에 탄소와 수소로 이루어진 ‘메틸기’가 붙었다 떼어지며 유전자의 스위치를 켰다 끈다. 그런데 몸속에서 DNA 메틸화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면 유전자 발현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는다. DNA 메틸화의 변화는 암 또는 노화에 따른 장기 기능 저하의 지표로 여겨진다.

연구팀은 노화에 따른 인체의 메틸화 패턴을 알아내기 위해 전례 없이 방대한 자료를 모았다. 18세부터 106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에게서 피부, 근육, 폐, 위, 망막, 간 등 총 17개 인체 조직에서 취한 1만5000여 개 샘플을 분석한 것이다. 그리고 약 90만 개의 DNA 위치를 하나하나 살피며, 나이 들수록 메틸화가 어떻게 바뀌는지 추적했다. 쉽게 말해 인체의 노화 지도를 완성한 것이다.

이 노화 지도로 알아낸 첫 번째 발견은 장기별 노화 속도다. 분석 결과, 가장 노화가 빨리 일어나는 장기는 망막이었고, 반대로 노화 속도가 가장 느린 장기는 자궁경부였다. 이 외에도 위와 대동맥은 상대적으로 노화가 빨리 진행됐으며, 피부와 간은 비교적 더디게 나타났다. 망막이 다른 기관보다 앞서 늙기 때문에 신체 노화 속도를 가늠하는 조기 지표가 될 수 있다.

연구팀은 노화와 관련된 유전자도 찾아냈다. 장기에 상관없이 메틸화 변화가 잘 일어나는 유전자를 골라낸 것이다. 세포 노화와 대사 과정에 깊이 관여하는 HDAC4와 HOX 유전자군, 비만과 당뇨 대사질환과 관련 있는 MEST 등을 확인했다. 그리고 연구팀은 PCDHG 유전자가 여러 장기에서 공통으로 노화 과정을 촉진하는 요인임을 확인했다. 이 유전자는 신경세포를 연결하는 단백질을 만들어 뇌 건강과 직결된다.

이번 연구는 질병의 조기 발견에도 활용 가능해 의미가 더 크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뇌에서 PDCDHG의 메틸화 변화가 평균보다 일찍 나타났다면 알츠하이머 같은 인지 질환 위험이 더 높다고 해석, 선제적으로 예방 및 치료를 진행할 수 있다. 또한 이번 연구를 발판으로 노화를 지연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 노화 관련 유전자를 중심으로 메틸화를 조절하는 약물 개발도 가능할 것이다.

이번 연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정밀한 노화 지도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라이프니츠 노화 연구소의 후성유전학자 홀거 비숍은 “인간 유전체에는 약 3000만 개의 후성유전학적으로 변형되는 부위가 있다”며 “이번 연구처럼 광범위한 분석조차도 전체 그림의 극히 일부만 포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노화 지도는 미래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그동안은 무작위적인 메틸화 오류가 노화의 지배적 요인이라고 여겨졌지만, 이번 연구로 체계적이고 조직 특이적인 메틸화 변화 역시 노화 과정에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처럼 노화 지도는 앞으로 연구자들이 노화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과학자들이 점차 생체시계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밝혀내다 보면, 언젠가는 생체 시계를 어떻게 재설정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억해주세요
박영경
과학 칼럼니스트
박영경 과학 칼럼니스트
이번 연구는 질병의 조기 발견에도 활용 가능해 의미가 더 크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뇌에서 PDCDHG의 메틸화 변화가 평균보다 일찍 나타났다면 알츠하이머 같은 인지 질환 위험이 더 높다고 해석해 선제적으로 예방 및 치료를 진행할 수 있다. 이번 연구를 발판으로 노화를 지연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 노화 관련 유전자를 중심으로 메틸화를 조절하는 약물 개발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