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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이은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그래픽=이은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K팝 걸그룹이 춤과 노래로 악귀를 물리치는 내용의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이어갑니다. 시청 횟수 기준으로 넷플릭스 역대 영화 2위에 오른 데 이어 오리지널사운드트랙 수록곡 ‘골든(Golden)’은 세계 양대 음원 차트인 미국 ‘빌보드 핫 100’과 영국 ‘오피셜 톱 100’을 모두 석권했습니다. 팝 음악 주류 시장에선 한계가 있을 것이라던 K팝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겁니다.

케데헌은 ‘한류(韓流)’를 뜻하는 K웨이브가 국경을 뛰어넘은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일본 소니의 미국 내 계열사인 소니픽처스가 만들었고, 음악은 미국 유니버설뮤직그룹 산하의 리퍼블릭레코드가 맡았습니다. 방영 플랫폼은 넷플릭스죠. ‘K자만 들어가면 돈이 된다’는 세상이니 외국 기업도 가만있을 리 없습니다. 한국 기획사를 거치지 않고도 K콘텐츠가 흥행할 수 있다는 게 입증되고 있습니다. 케데헌에서 파생해 나올 수 있는 콘텐츠 가치(지식재산권, IP)는 최대 1조원에 이릅니다. 그 막대한 수익을 우리 기업이 아닌, 미국과 일본 기업이 가져가고 있습니다.

외국 기업이 K웨이브에 편승하는 현상은 영화와 음악 외에 식품, 화장품 등에서도 나타납니다. 글로벌 기업 간 주도권 경쟁이 벌어지는 이른바 ‘K웨이브 3.0’ 시대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K웨이브의 이 같은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4·5면에서 살펴봤습니다.콘텐츠 국경 사라진 글로벌 제작 시대
'K웨이브' 열풍에도 정체성 물음은 남아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K웨이브 3.0’이란 한류 콘텐츠나 상품을 우리나라가 독점하던 시대가 지나고, 전 세계 기업들이 무한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자본만 있으면 세계 어떤 기업, 어떤 기획자도 K웨이브 제품을 선보일 수 있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죠.

소비재까지 번진 K웨이브

버전 ‘3.0’이라고 부르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1990년대 말에 시작된 ‘K웨이브 1.0’은 드라마 ‘겨울연가’의 흥행이 계기였습니다. 한국 드라마에 관심 많았던 아시아 국가의 마니아들이 주 소비층이었죠. 이게 2010년대 BTS의 등장으로 ‘2.0 시대’를 맞습니다. K팝이 글로벌 시장에서 대중화하기 시작했고, 우리 먹거리나 화장품 등 소비재도 본격적으로 유행을 탔죠. ‘3.0 시대’는 K자가 붙은 브랜드가 글로벌 주류 또는 표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문화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으로 치고 들어갔다는 뜻이죠.

일반 소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 기업들은 한국의 음식과 화장품을 선보이느라 열심입니다. 세계 1위 식품회사 네슬레의 미국 자회사인 매기는 지난 5월 포장지에 한글로 ‘라면’이란 글씨를 새겨 넣은 ‘한국 매운 라면’을 내놨습니다. 소스 브랜드인 하인즈는 한국식 바비큐 소스를 출시했어요. 미국 대형마트 트레이더조는 자체브랜드(PB) 상품으로 주먹밥, 비빔국수, 잡채비빔밥, 냉동김밥을 선보여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미국 중식 프랜차이즈 판다익스프레스도 삼양식품의 불닭 소스를 활용한 치킨 메뉴를 팔기 시작했어요. 한국 느낌이 나는 맛이나 취향, 스타일, 그리고 ‘한글’을 마케팅에 활용하면 불티나게 팔리기 때문입니다. ‘물광 피부’로 유명한 K뷰티의 대표적 이미지가 ‘글라스 스킨’인데요, 이를 벤치마킹한 화장품 브랜드도 있습니다.

국내 기업 자생력 약화?

한 나라가 독점하지 않는 ‘콘텐츠의 글로벌화’는 대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콘텐츠의 국경이 허물어지면서 다양한 국가와 기업이 함께 창작하고 유통하는 시대가 된 거죠. 과거에도 미국 할리우드 영화가 글로벌 공동 제작·유통 방식을 통해 만들어졌고, 일본 애니메이션도 여러 나라 기업이 함께 만들고 유통해왔습니다. 프랑스의 만화 산업도 일본·한국·미국 등 다양한 국가의 아티스트와 출판사가 함께 참여해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길게 보면 K콘텐츠의 국제적 입지를 탄탄하게 만들어줄 전망입니다.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동영상스트리밍서비스(OTT)와의 협력은 제작 규모와 다양성, 배급망 등에서 긍정적 요소가 많습니다. 기술과 자본이 더욱 많이 유입돼 국내 기업의 자본과 기술적 한계, 좁은 내수시장에 따른 투자 위험 등을 보완해줄 수 있습니다. 콘텐츠 자체도 더 다양하고 창의적인 작품이 많아져 콘텐츠의 본질적 경쟁력이 올라갈 수 있지요. 알다시피 K콘텐츠의 성공은 궁극적으로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고, 관광객 유입과 소비재 수출까지 견인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작·유통의 해외자본 의존도가 높아져 국내 기업의 자생력은 약화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더욱 격화될 수밖에 없는 시장경쟁, 한국 문화의 정체성과 개성이 약화하는 문제도 경계해야 한다는 전문가 지적이 많습니다.

과연 ‘K콘텐츠’ 맞나?

다시 생각해볼 부분은 K콘텐츠의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과거 BTS의 ‘다이너마이트’란 곡이 히트를 쳤을 때, 신나는 리듬감과 세계 어느 나라 팬도 흥얼거릴 수 있는 멜로디가 매력적이었죠. 그러나 어디에서도 한국적 정서나 개성을 찾아볼 수 없었죠. 이후 기획부터 작사·작곡 등에 해외 아티스트들이 참여하면서 번지수를 알 수 없는 K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물론 지금은 K콘텐츠가 세계인과 호흡하는 단계로 발전한 데 따른 불가피한 측면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나옵니다. ‘케데헌’ 영상에도 한국적 요소가 여전히 많죠. 그럼에도 K콘텐츠의 글로벌화와 관련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볼 주제인 것 같습니다.NIE 포인트1. ‘K웨이브 3.0’ 시대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2. 자신이 체험한 K웨이브 글로벌 열풍에 대해 친구들과 공유해보자.

3. K콘텐츠의 정체성 문제를 주제로 토론해보자.플랫폼 경제의 위험 요소 '승자독식'
지식재산권으로 K콘텐츠 미래 지켜야
지난 6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오징어 게임 팝업 행사에서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단체줄넘기를 즐기고 있다. /한경DB
지난 6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오징어 게임 팝업 행사에서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단체줄넘기를 즐기고 있다. /한경DB
세계인이 ‘K웨이브’에 열광하는 것은 19세기 말 유럽에 분 ‘자포니즘(Japonism·일본 문화 유행)’을 연상시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디지털 시대를 맞아 꽃피우고 있는 플랫폼 기반 경제(Platform Economy)가 바탕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똑같은 콘텐츠라도 플랫폼 경제에선 그 파급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배가됩니다.

‘네트워크 효과’를 아시나요?

플랫폼 경제의 특성이 무엇인지 조금 더 살펴볼까요? 여기에선 기업 등 공급자와 소비자, 제3의 개발사, 유통업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플랫폼을 중심으로 연결됩니다. 이들이 자유롭게 협력·경쟁하며 거래를 하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가 덧붙여집니다. 전략경영의 선구자 마이클 포터가 제시한 전통산업의 가치사슬(value chain)과는 다릅니다. 가치사슬이란 기업이 제품 또는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원재료, 노동력, 자본 등의 자원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것을 말합니다. 전통산업에선 ‘연구개발(R&D)-생산-유통-소비’ 등 한쪽 방향으로만 가치사슬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복잡하고도 새로운 가치사슬이 만들어집니다. 이름하여, 가치 네트워크(Value Network)라고 표현할 수 있죠. 장 티롤 등 경제학자들이 설명한 양면·다면시장(Two-sided/Multi-sided Market) 이론도 같은 얘기입니다.

디지털 플랫폼에선 생산자, 소비자 등의 참여 집단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가치가 창출되는 ‘네트워크 효과’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소셜미디어의 사용자 수가 증가하면 콘텐츠의 양이나 상호작용의 기회가 많아지고, 연결의 범위는 넓어지며, 거래비용은 줄어듭니다. 이는 플랫폼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그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메칼프의 법칙’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일종의 규모의 경제로 인해 하나의 플랫폼이 독점적인 지위까지 과도하게 커지면 승자독식(Winner-take-all) 문제가 빚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의 교훈

그래서 강조되는 부분이 콘텐츠의 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재산권(IP)입니다. 방송·영화·드라마 등 K콘텐츠가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플랫폼에 완제품 형태로 납품될 경우, 국내 제작사는 하청업체로 전락하고 장기적으로 플랫폼이 흥행 성과와 수익, IP 가치를 독점하게 될 것이란 경고가 많습니다. 이런 위험은 영화 ‘오징어 게임’에서 확인됩니다. 넷플릭스가 오리지널로 제작한 대표적인 K콘텐츠인 ‘오징어 게임’은 세계적으로 9억달러(약 1조2000억원)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제작사는 계약된 제작비인 254억원 외에 추가 수익을 거의 얻지 못했습니다. 넷플릭스가 콘텐츠의 배급권뿐 아니라 IP를 독점하는 완제품 납품 구조였기 때문이죠.

대한상공회의소도 최근의 ‘케데헌 열풍’과 관련해 향후 IP 확보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IP를 보유하고 있으면 하나의 콘텐츠 판매에서 그치지 않고, 리메이크·웹툰·게임·굿즈·캐릭터 라이선싱 등 다방면으로 수익 모델을 늘려갈 수 있습니다. IP를 가진 기업은 해외 진출이 더욱 쉬워지고, 국부를 늘리는 데도 큰 도움을 줍니다. 상의에 따르면 IP 사용료 수출이 10% 늘면 국내총생산(GDP)은 0.4% 상승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소프트파워(문화적 영향력)를 더욱 키울 수 있는 이점도 있지요.

다행히 최근 CJ ENM, 스튜디오드래곤 등은 자체 IP를 확보하고 글로벌 협업을 늘리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 오리지널’의 수출을 넘어 현지 리메이크·글로벌 합작 드라마 사업 등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K콘텐츠 사업의 IP 규모는 2023년 기준으로 약 33조2000억원에 이릅니다. 주로 웹툰·웹소설, 캐릭터, 게임, 드라마 등이 원천 IP가 되어 다양한 사업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IP를 많이 확보한 ‘세계적 라이선서 50’ 명단에는 우리나라 기업이 한 곳도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NIE 포인트1. ‘플랫폼 경제’의 특징에 대해 탐구해보자.

2. 네트워크 효과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3. 지식재산권의 개념, 보호 법률, 보호 범위 등에 대해 공부해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