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레프 톨스토이 <유년 시절>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유년 시절>은 톨스토이가 가장 처음 쓴 작품이면서 자전적 소설이어서 특히 의미가 있다. <소년 시절> <청년 시절>로 이어지는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유년 시절>이 자전적이라고 하나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유년 시절>의 주인공 니콜레니카는 열 살 때 어머니와 이별하지만 톨스토이는 두 살과 아홉 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읜다. 고모의 후원으로 어린 시절 집에서 교육받은 톨스토이는 16세에 카잔대학교 동양어대학 아랍·터키어과에 입학한다. <유년 시절>에도 니콜레니카가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교육받는 장면이 나온다.
24세였던 1852년, 톨스토이는 <유년 시절>을 발표하자마자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어린아이의 심리를 섬세히 해부하면서, 동시에 예술성을 잃지 않은 이상적이고도 객관적인 묘사로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새로운 창작 방법 양식을 개척했다”는 극찬을 듣는다.
러시아 철학자 크로폿킨은 “시적인 매력으로 차 있고 지극히 참신하며 문학상의 온갖 매너리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이 무명작가는 일약 러시아 문단의 총아가 되고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등과 견주게 되었다”고 평했다.
<유년 시절>에 대한 여러 찬사가 아니더라도 책장을 넘기면 바로 이국적인 신선함과 고전적이면서 품격 높은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28개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니콜레니카와 주변 사람들의 삶이 아기자기하게 얽히면서 잔잔한 감동을 안기는 작품이다. 지극히 단순한 열 살 남자아이의 내면을 고스란히 담은 이야기 속에 순수한 아름다움이 가득하다는 게 이 소설의 강점이다.모스크바에서 만난 낯선 환경열 번째 생일을 맞은 나는 퇴역 군인인 아버지가 소유한 저택에서 하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다. 나는 별일 아닌 일에도 눈물을 잘 흘리고 미소 지을 때 더욱 아름다운 엄마를 무척 사랑한다. 소파에서 잠든 나를 방으로 돌아가라고 부드럽게 독려하는 엄마에게 “사랑하는 엄마, 난 엄마가 너무 좋아”라고 말한 뒤 침대로 가서 “주여, 아빠와 엄마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할 때 기쁨에 가득 차곤 한다.
톨스토이는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유년 시절에 내가 가지고 있던 싱싱함, 근심 걱정 없는 마음, 사랑의 요구와 믿음의 힘이 과연 언젠가는 돌아올 것인가? 두 가지 최상의 선, 즉 순진무구한 명랑함과 최대한의 사랑 요구가 인생의 유일한 동력이었던 때보다 더 좋은 때가 있을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 아버지의 결정으로 엄마 곁을 떠나 모스크바 할머니 댁으로 가면서 나의 유년 시절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낯선 땅으로 와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넓적한 코와 두툼한 입술, 조그만 잿빛 눈 대신 미남으로 바꿔달라”는 기도를 하기까지 한다.
어느 날 할머니 댁에 놀러 온 세료쥐아에게 강하게 끌린다. 독특한 아름다움과 매혹적인 웃음소리를 가진 세료쥐아와 어울리다가 그가 가난한 외국인의 아들을 괴롭힐 때 지켜보기만 본다. 곧 그 소년이 육체적인 고통보다 “이유 없이 싫어하고 따돌려서 그토록 서럽게 울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세료쥐아에게 대장부로 보이고 싶어 불쌍한 아이를 돕지 않은 것이 어린 시절의 유일한 오점”이라며 후회한다.소네치카에 빠져 있을 때 들려온 소식할머니 집에서 열린 무도회에 온 예쁜 소녀 소네치카에게 푹 빠진 나는 세료쥐아는 까맣게 잊고 기분 좋은 온기를 느끼면서 달콤한 공상과 기억 속에 파묻힌다. 소네치카를 위해 뭐든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어머니가 몹시 아프다는 전갈이 오고, 마차를 타고 시골로 향한다.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어릴 때 부모를 잃은 톨스토이의 감정이 열 살에 어머니와 이별한 니콜레니카의 슬픔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다 자라지 않았지만 세상을 보는 시각이 어느 정도 확립된 어린아이가 맞닥뜨린 죽음, 이후 이어지는 일상은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섬세한 내용이어서 공감과 함께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유년 시절>에 부모님을 평생을 도우며 나를 키워주고 돌봐준 집안 일꾼들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어린 자녀들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성심을 다 바친 그들의 삶도 깊은 감동을 안긴다. 모두가 거쳐온 유년 시절, 가장 순수했던 그때가 떠오르면서 아련한 감정에 녹아들게 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