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생명체 수정의 비밀
지구상 거의 모든 동물의 생명은 정자가 난자에 이동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두 세포는 서로를 인식하고 결합한다. 굉장히 단순해 보이고, 우리에겐 아주 익숙한 과학적 사실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미스터리 투성이다. 일단 우리는 정자와 난자의 만남 과정에서 ‘무엇이’ ‘어떻게’ 관여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런데 최근 이 미스터리를 한 꺼풀 벗겨내는 연구가 발표됐다. 정자 세포와 난자 세포가 서로를 인식하고 결합하는 메커니즘이 밝혀진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대학교 분자병리학연구소가 정자와 난자의 결합 과정을 밝히기 위해 시행한 실험 장면. 빨간색은 쥐의 난자, 파란색은 정자다.  출처: Cell
오스트리아 빈대학교 분자병리학연구소가 정자와 난자의 결합 과정을 밝히기 위해 시행한 실험 장면. 빨간색은 쥐의 난자, 파란색은 정자다. 출처: Cell
빅토리아 데네케 오스트리아 빈대학교 분자병리연구소 연구원이 이끄는 연구팀은 정자 세포와 난자 세포가 결합할 때 관여하는 단백질에 주목했다. 그동안 두 세포가 결합할 때 관여하는 단백질은 크게 세 종류로 알려져 있었다. 2005년 정자에 있는 단백질인 ‘이즈모(IZUMO) 1’이 가장 먼저 발견됐다. 당시 일본 도쿄대 연구팀은 쥐에게서 이즈모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삭제하는 실험을 진행했고, 그 결과 다른 기능은 멀쩡했지만, 오직 난자 세포와 융합하는 기능만 상실됐다. 그 이후 영국 웰컴 트러스 생어 연구소에서 정자 세포와의 결합에 관여하는 난자 표면 단백질 ‘주노(JUNO)’를 발견했고, 이즈모와 유사하게 정자에서 난자 결합 과정에 관여하는 ‘스파카(SPACA) 6’도 확인됐다. 이로써 정자와 난자 세포가 결합할 때 관여하는 단백질의 존재는 모두 밝혀진 듯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들이 결합하는 메커니즘이 도무지 밝혀지지 않아 정자와 난자와의 만남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오스트리아 연구팀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에 관여하는 새로운 단백질이 있을 것이라 가정하고, 구글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알파폴드(AlphaFold)로 그 존재를 찾았다. 알파폴드는 AI를 활용해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기술로, 이 기술을 개발한 데미스 허사비스와 존 점퍼가 2024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오스트리아 연구팀은 제브라피시 정소에서 발현되는 1400개 이상의 단백질 구조를 생성해 난자와의 결합 과정에 관여할 가능성이 높은 단백질을 찾아냈다. 알파폴드의 분석 결과 이즈모1, 스파카 6 외에도 ‘Tmem81’ 단백질 3개가 모여야 난자에 붙을 수 있는 복합체가 만들어졌다. 연구를 이끈 빅토리아 데네케 연구원은 “알파폴드로 정자와 난자의 결합에 관여하는 단백질을 찾는 과정은 2~3주 동안 진행됐고 빈대학의 서버를 독점해야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연구팀은 알파폴드가 발견한 Tmem81이 실제로 정자와 난자의 결합 과정에 관여하는지 실험으로도 확인했다. 제브리피시와 생쥐에서 Tmem81 단백질을 생성하는 유전자를 삭제한 결과, 정자는 정상적으로 헤엄쳤지만, 난자와 결합하지 못했다.

또 이번 연구로 정자와 난자가 어떻게 결합하는지도 밝혀졌다. 정자 단백질은 묶음 형태로 마치 ‘열쇠’처럼 작동했으며, 난자 세포의 ‘자물쇠’에 꼭 맞아 들어갈 때 결합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추가로 밝혀진 사실은 물고기에서는 난자에서 주노 단백질이 아닌, 바운서(Bouncer)라는 단백질이 자물쇠 역할을 했다. 이번 연구에 함께 참여한 안드레아 파울리 연구원은 “진화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새로운 난자 단백질이 자물쇠 역할을 하게 됐을 것”이라며 “자물쇠는 바뀌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열쇠(정자 단백질 묶음)는 변함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오스트리아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는 지난 10월 17일 국제 학술지 ‘셀(Cell)’에 실렸다. 한편 앞선 4월 스웨덴 스톡홀름대 생화학과 연구팀도 비슷한 연구 결과를 ‘e라이프’에 발표했다. 두 연구팀 모두 알파폴드를 사용해 포유류의 정자와 난자가 수정할 때 관여하는 단백질 3개의 존재를 확인했다.

과학자들은 이번 발견이 불임을 치료하거나 새로운 피임 방법을 개발하는 데 활용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미네소타대의 한 생물과학부 교수는 “이번 연구는 특히 남성 피임약 개발에 도움을 줄 것”이라며 “올해 노벨화학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 기억해주세요
[과학과 놀자] 핵심은 정자 단백질 묶음의 역할 ··AI가 풀었다
오스트리아 연구팀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에 관여하는 새로운 단백질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구글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알파폴드(AlphaFold)로 그 존재를 찾았다. 알파폴드는 AI를 활용해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기술로, 이 기술을 개발한 데미스 허사비스와 존 점퍼가 2024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과학자들은 이번 발견이 불임을 치료하거나 새로운 피임 방법을 개발하는 데 활용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박영경 과학칼럼니스트·前 동아사이언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