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바퀴벌레의 기원
깜깜한 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보인다. 혼비백산하며 급하게 불을 켜니, 번개처럼 빠르게 도망가 숨어버린다. 바로 해충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극혐'의 대명사 바퀴벌레다. 바퀴벌레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곤충 중 하나다. 지금까지 발견된 화석에 따르면, 약 3억 2000만 년 전인 고생대 석탄기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퀴벌레는 환경 적응 능력이 매우 뛰어나 공룡이 사라진 백악기의 대멸종 시기에도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번성하고 있다. 전 세계에 바퀴벌레 4600여 종이 서식하며, 열대지방부터 북극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이렇게 많은 바퀴벌레 중 인간의 거주지에서 발견되는 바퀴벌레는 약 30종 정도다. 한국에는 약 10종의 바퀴벌레가 서식하는데, 이 중에서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바퀴벌레는 ‘독일바퀴(Blatella germanica)’라고 불리는 종이다.
독일바퀴는 1756년부터 1763년까지 일어난 7년 전쟁 중 군대의 식량 저장고에서 처음 발견됐다. 이때는 서로 상대의 이름을 따 ‘러시아 바퀴벌레’ 혹은 ‘프로이센 바퀴벌레’로 불렸다. 그러다 1767년 ‘생물 분류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가 ‘바퀴’라는 종을 명명하면서 독일바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이름과 달리, 독일바퀴는 독일과 크게 관련이 없다. 린네도 채집된 표본이 독일에서 온 것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게다가 독일바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종이지만, 야생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직 인간의 거주지에서만 볼 수 있다.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키우는 ‘반려벌레’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독일바퀴는 어디서 어떻게 진화해 인간과 살게 됐을까?독일바퀴는 어떻게 전 세계로 퍼졌을까최근 싱가포르 국립대가 이끄는 국제 공동 연구팀이 그동안 수수께끼로 여겨지던 독일바퀴의 기원을 찾아냈다. 연구팀은 호주·브라질·에티오피아·중국·한국 등 전 세계 17개국 281마리의 바퀴벌레에서 DNA를 채취하고, ‘미토콘드리아 시토크롬 산화효소 서브유닛(CO1)’이라는 특정 유전자 영역의 DNA 염기서열을 비교했다. 사람에게 고유한 지문이 있는 것처럼, 종마다 고유한 DNA 염기서열이 있는데, 이를 ‘DNA 바코드’라고 한다. CO1은 DNA 바코드로 흔하게 활용되는 유전자로, 여러 종 간 유연관계를 분석해 진화 과정을 연구하는 데 유용하다.
분석 결과, 독일바퀴의 CO1 염기서열은 인도 벵골만에 서식하는 아시아바퀴(Blattella asahinai)의 것과 거의 일치했다. 단지 9개 염기쌍 정도만 차이가 났을 뿐이다. 연구팀은 “두 종이 불과 2100년 전에 분화되었다”며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눈 깜짝할 사이”라고 말했다.
자연에서 살던 아시아바퀴는 농부들이 서식지를 개간하면서 인간과 공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화된 독일바퀴는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나갔을까? 연구팀은 지리적 분포와 함께 다양한 바퀴벌레의 염기서열을 추가로 분석했다.
그 결과, 독일바퀴는 두 차례의 대이동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첫 번째 대이동은 1200년 전으로, 이 시기는 역대 이슬람 제국 중 가장 넓은 땅을 다스리던 우마이야 왕조가 집권하던 때다. 독일바퀴는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와 상인들과 함께 서쪽으로 이동했고, 약 270년 전 유럽에 도착했다.날개 달린 바퀴벌레가 비행을 멈춘 이유독일바퀴의 두 번째 대이동은 390년 전에 일어났다. 제국주의 시기,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식민지무역을 시작하면서 동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증기기관을 단 선박이 등장하면서 독일바퀴는 인간의 과학기술 발전에 힘입어 점점 더 빨리 새로운 서식지를 개척했다. 그리고 약 170년 전, 중국과 한국까지 정복했다.
연구팀은 야외에서 서식하던 독일바퀴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난방으로 따뜻한 실내에 살던 독일바퀴들이 살아남아 인간에게 의존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야행성으로 진화했고, 날개가 있긴 하지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비행을 멈췄다는 것이다.
최근 바퀴벌레는 살충제에 대한 내성이 강해졌으며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또 한번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연구팀은 바퀴벌레의 기원과 유전적 다양성을 이해하면 살충제 내성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억해주세요 연구팀은 ‘미토콘드리아 시토크롬 산화효소 서브유닛(CO1)’이라는 특정 유전자 영역의 DNA 염기서열을 비교했다. 사람에게 고유한 지문이 있는 것처럼, 종마다 고유한 DNA 염기 서열이 있는데, 이를 ‘DNA 바코드’라고 한다. CO1은 DNA 바코드로 흔하게 활용되는 유전자로, 여러 종 간 유연관계를 분석해 진화 과정을 연구하는 데 유용하다.
오혜진 과학칼럼니스트·前 동아사이언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