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얼음이 미끄러운 이유
33℃가 넘는 폭염과 열대야가 계속되고 있다. 얼음 동동 띄운 음료로 더위를 달래며 겨울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차가운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며 스케이트를 타는 상상만 해도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얼음은 왜 미끄러울까?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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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놀자] 얼음표면의 '준액체층'이 윤활유 역할
과학자들은 150년간 얼음이 미끄러운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19세기 중반, ‘켈빈 경’으로 유명한 윌리엄 톰슨은 압력으로 인해 얼음이 녹아 미끄러운 층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탈 때 스르륵 미끄러지는 이유는 우리의 체중과 면적이 좁은 스케이트 날 때문에 얼음 표면에 큰 압력이 가해지고, 이로 인해 얼음이 녹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학 시간에 배운 물의 상평형 그래프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고체에 온도를 높이거나 압력을 가하면 액체로 바뀐다.

이 가설은 오랜 시간 가장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이후 연구를 통해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가설대로라면 -10℃보다 낮은 온도에서는 얼음이 녹지 않아 스케이트를 탈 수 없어야 하고, 일반 신발을 신고 얼음 위를 걸어도 미끄러지지 않아야 한다. 얼음에 가해지는 압력이 1기압 올라가도, 얼음의 녹는점은 겨우 0.01℃만 내려갈 뿐이기 때문이다. 낮은 온도에서 스케이트를 타려면 수백 kg의 무게가 나가는 코끼리 발에 스케이트를 신겨도 불가능할 만큼 엄청난 압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압력만으로는 얼음이 미끄러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다른 가설을 생각해냈다. 얼음 위를 움직이면 마찰이 생기는데, 이때 생기는 마찰열이 얼음 표면을 녹여 물 층을 만든다는 것이다. 여러 실험을 통해 이 가설이 입증되는 듯했지만, 역시 문제가 있었다. 빙판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어도 미끄럽다는 사실은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듭된 연구로 현재 가장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가설은 얼음 표면에 원래부터 물 층이 있고, 이 층이 윤활유 역할을 해 얼음 표면의 마찰을 크게 줄인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1850년대 영국의 물리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가 처음 제안했는데, 1997년에야 실험으로 증명됐다. 미국 로런스 버클리 국립연구소 연구팀은 얼음 표면에 전자를 쏘아, 전자가 어떻게 튕겨 나오는지 관측해 물 층의 존재를 확인했다. 최근에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활용해 이 층의 구조를 더 자세히 연구하고 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얼음 표면에는 물처럼 행동하는 분자들이 있는 ‘준액체층’이 있다. 물과 비슷하지만 분자 구조가 액체 상태의 물과 정확히 같지는 않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 준액체층은 온도에 따라 1~100㎛까지 두께가 변할 수 있다.

그런데 준액체층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물 분자(H2O)는 화학식에서 알 수 있듯 산소 원자 하나와 수소 원자 둘로 이뤄져 있다. 얼음 상태의 물 분자들은 강한 수소결합을 통해 육각형의 규칙적인 결정 구조를 가진다. 하나의 물 분자는 다른 3개의 물 분자와 결합하는데, 표면에 있는 물 분자들은 가장자리에 있다 보니 최대 2개의 분자와만 결합할 수 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결합력이 약한 분자들이 준액체층을 이뤄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2019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연구팀은 준액체층의 점성이 일반적인 물보다 50배나 크고, 탄성이 있어 훌륭한 윤활유가 되기 때문에 얼음이 미끄러운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5월에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연구팀이 원자력 현미경으로 -150℃에서 얼음의 수소 원자들을 관찰한 결과, 얼음이 두 종류의 결정 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얼음은 조건에 따라 19개 이상의 결정 구조를 가지는데, 우리가 아는 육각형의 얼음 결정은 ‘얼음 Ⅰh’다. 그런데 종종 입방체 모양의 ‘얼음 Ⅰc’도 발견된다. 연구팀은 얼음 표면이 이 두 가지 결정 구조로 이뤄져 있으며, 두 얼음의 경계에서 무질서한 물 분자들이 이어져 있는 모습을 관찰했다. 또 시뮬레이션 결과, 온도를 높일수록 이 무질서 영역이 확장돼 얼음의 준액체층을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얼음이지만, 아직도 얼음에 대해 밝혀내야 할 비밀이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얼음이 미끄러운 이유를 명확히 알아낸다면 겨울철 안전, 스포츠, 그리고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를 토대로 얼음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가기를 기대한다. √ 기억해주세요
[과학과 놀자] 얼음표면의 '준액체층'이 윤활유 역할
물 분자(H2O)는 화학식에서 알 수 있듯 산소 원자 하나와 수소 원자 둘로 이뤄져 있다. 얼음 상태의 물 분자들은 강한 수소결합을 통해 육각형의 규칙적인 결정 구조를 가진다. 하나의 물 분자는 다른 3개의 물 분자와 결합하는데, 표면에 있는 물 분자들은 가장자리에 있다 보니 최대 2개의 분자와만 결합할 수 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결합력이 약한 분자들이 준액체층을 이뤄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오혜진 과학칼럼니스트·前 동아사이언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