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관의 인문 논술 강의노트
논술 출제방식과 주제에 대한 기본이해 (5)
여러 학문을 이론 학문과 실천 학문으로 구분한 최초의 학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실천 학문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윤리학입니다. 윤리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에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은 이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논쟁하며 바람직한 준칙을 세우려고 노력해왔어요. 이는 교육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해 중고등학교에서도 도덕, 윤리 등으로 심화하면서 배우게 됩니다. 따라서 논술에서도 윤리 영역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 주제입니다. 윤리학은 다시 여러 분파로 나뉩니다. 그중에서 규범을 말하는 이론 윤리학과 실천 윤리학은 논술의 주요 출제 주제 중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논술 출제방식과 주제에 대한 기본이해 (5)
이번에 다룰 주제는 최근에도 여러 차례 출제되고 있는 의무론과 공리주의의 이론 윤리학입니다. 잘 알려진 공리주의뿐 아니라 의무론도 논술고사에서 상당히 빈번하게 출제되고, 윤리적 주제가 아닐 때도 칸트나 벤담 같은 사상가들에 대한 설명이 출제되므로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의무론은 행동의 결과보다 규칙과 의무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입니다. 반면 공리주의는 행동의 원인이나 과정보다 결과를 중심으로 판단해 사회 전체가 행복해지면 어떤 행위도 옳다고 주장하는 도덕입니다. 양자의 특징만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윤리학 사고실험으로 널리 알려진 트롤리 딜레마(광차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면 위 두 윤리관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브레이크가 고장난 열차의 기관사이고, 열차가 향하는 선로의 직진 방향 앞에 5명, 회전 방향 앞에 1명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지요. 여러분은 단지 열차의 방향을 돌릴 수만 있고 방향을 조작하지 않으면 열차는 직진할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 윤리적일까요? <그림> 트롤리 딜레마의 상황(위키백과에서 그림 참조)
의무론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이는 선택한 행동의 결과보다 규칙과 의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인간 존엄성의 규칙에 따른다면, 5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을 수단화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리주의에 따르자면 방향을 돌리는 것이 옳습니다. 누군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1명을 죽게 하더라도 5명을 살리는 것이 더 나은 결과라는 논리에 따른 판단이죠.
우리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딜레마와 종종 마주치게 됩니다. 극단적으로는 더들리와 스티븐스 사건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대서양 한복판에서 난파된 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거대한 배가 난파되자 이들은 작은 보트에 아무런 준비 없이 몸을 싣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절망감에 젖어 망망대해를 떠돌게 되었지요. 모두가 큰 고통을 겪던 와중에 가장 나이 어린 고아 리처드 파커는 갈증을 참지 못한 채 바닷물을 마시고 탈수증으로 시름시름 앓게 되었습니다. 이에 나머지 선원들은 공모해 파커를 죽이고 잡아먹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실제로 이들은 구조된 후 재판을 받았고, 생존자들에게 호의적이던 여론에 의해 6개월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공리주의적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의무론적 관점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아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대외경제정책 연구원의 발표 자료 중 일부입니다.
□ 러시아 진출 글로벌 기업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대러시아 제재에 따라 러시아 사업을 철수하거나 중단한다고 발표했지만, 출구 전략을 수립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임.
- 현지에 묶인 자본을 단기간 회수하기 어렵고, 기업 부채 등이 누적되어 있어 매수자를 찾기 어렵기 때문임.
- 러시아는 외국인 보유 지분 25%를 초과하는 회사가 러시아 내 사업을 중단할 경우 외부 경영진을 선임하게 할 수 있고, 향후 이를 국유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
□ 이에 원자재 생산 및 기술보유 국가들과의 연대 파트너십 구축을 통한 우리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 지원, 협력 상대국과의 원자재 스왑 등 글로벌 협력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음.
위 내용을 윤리관으로 이해하자면 공리주의에 가깝지요? 인간의 존엄성 등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더 많은 이익 추구의 관점에서 사건을 분석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위 보도는 경제정책연구의 일환이므로 당연합니다. 그런데 뉴스 기사를 보더라도 보도 태도의 성향을 나눠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외국 신문들의 국제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인명 살상 등이 많이 보도되었습니다. 하지만 러-우전쟁 동안 국내 뉴스에서는 러-우전쟁으로 인한 물가 및 경제 문제 등을 접하는 빈도가 더 잦았고, 신문 기사 등에서도 대대적인 폭격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경제적 손해 타산에 가까운 기사가 많았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하지요?
아래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중 일부로, 논술고사에 많이 출제되는 장면입니다.
“그 노파한테서는 언제든지 돈을 꿀 수가 있어. 유대인 못지않은 부자라서 단번에 5000루블도 내줄 수 있는 여자야. 그런데도 1루블짜리 전당물조차 마다하지 않거든. 우리 친구들도 그 노파를 자주 찾아가고 있어. 그런데 무서울 정도로 인색한 여자지….”
그리고 그는 그녀가 얼마나 사악하고 변덕스러운지 말하기 시작했다. 단 하루라도 기한을 어기면 물건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물건값의 4분의 1밖에 안 빌려주고, 이자는 한 달에 5부에서 7부까지 받는다는 말이었다.
“난 그 저주스러운 노파를 죽이고 도둑질을 한다고 해도, 결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 같아.” 열을 내면서 대학생이 덧붙여 말했다.
장교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지만, 생각해봐. 한편으로는 어리석고, 의미 없고, 하찮고, 못됐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아니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해만 끼치는 그런 병든 노파가 있어. 그 노파는 자기가 왜 사는지도 모르고, 또 그렇지 않아도 얼마 안 있으면 저절로 죽게 될 거야. 알았어? 알아듣겠어?”
“그래 알았어.” 장교는 흥분해 있는 친구를 주의 깊게 보면서 대답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움을 받지 못하면 좌절하고 말 싱싱한 젊은이가 있단 말이야. 그런 젊은이는 도처에 있어! 그리고 수도원으로 가게 될 노파의 돈으로 이루어지고 고쳐질 수 있는 수백수천 가지의 선한 사업과 계획들이 있단 말이야! 어쩌면 수백수천의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도 있고, 수십 가정이 극빈과 분열, 파멸, 타락으로부터 구원받을 수도 있어. 이 모든 일이 노파의 돈으로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작중 라스콜리니코프(주인공)의 생각은 공리주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혜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노파를 죽이고 싶다는 그의 말은 과정을 막론하고 결과적 관점에서 모든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논술 문제형으로 의무론과 공리주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