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Getty Images Bank
Getty Images Bank
출간 1년여 만에 30만 부 기념 특별판 출간, 전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위.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세운 기록이다. 빨치산 출신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3일장 기간에 일어난 일을 그린 소설의 성적이라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필경 어두운 이야기가 펼쳐졌으리라 짐작되는 소설이 왜 큰 울림을 주는 걸까.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아버지의 사랑과 헌신 확인하며 이별하는 여정
진한 전라도 사투리 대사가 페이지마다 아로새겨진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읽기 쉽지 않을 거라는 선입견은 책장을 넘기는 순간 바로 깨진다. 소설을 읽는 동안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그 한가운데서 수난을 겪은 개인의 질곡, 마을 전체를 아우르는 정,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까지 ‘사람’과 ‘사랑’이 넘쳐흐르는 것을 깨닫게 된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교 강단에 섰던 정지아 작가는 실제 빨치산의 딸이다.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만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서라벌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정지아 작가는 특별판 발간 기념 후기에서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날 아버지에게 “당신들이 목숨을 걸었던 이데올로기가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는데 기분이 어떠시냐”라고 냉소적으로 물었다고 피력한다. 그러자 “나는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다. 인간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때는 그 대안이 사회주의였을 뿐이다”라는 답이 돌아온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삶<아버지의 해방일지>에 아버지가 말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삶’이 펼쳐진다. 아버지는 1948년 겨울부터 19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위장 자수를 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 정착했지만 평생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고수하려 했던 이념은 남부군 출신인 아내의 ‘사회주의자답지 않은 행동’을 지적할 때나 드러나는 수준이다. 동지이자 부부인 두 사람은 전라남도 구례 산골짝에서 사는 게 어렵지 않았을지 모르나 소설의 화자인 딸 ‘나’에게 닥친 현실은 다르다.

가난한 ‘빨치산의 딸’이 점점 발전하는 자본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연좌제가 시행되던 시점에 아버지로 인해 공직에 나가지 못한 친척들로부터 쏟아진 원망까지 덮쳐온다. 게다가 결혼식 전날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파혼을 당하기까지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좋은 추억 외에 물려받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허리가 아파 누워있다시피 한 어머니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장례 치를 일이 무겁게 다가온다. 가난과 빨치산의 딸이라는 주홍글씨만 남겨준 아버지의 장례를 의무적으로 치르려던 딸에게 사흘간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죽하면 도움을 요청하겠느냐며 온 동네 궂은일을 자처하고, 앞뒤 안 따지고 보증을 서서 딸까지 어려움에 처하게 했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흘간 빈소를 가득 채우면서 나는 아버지를 새롭게 만나고 아버지의 삶을 재평가하게 된다. 끈끈하고 평범한 부녀로 재탄생1965년생인 정지아 작가가 57세에 발표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여러모로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일단 그 나이대 작가들의 소설 발표가 많지 않은 데다 요즘 출간되는 소설과 달리 소재가 무겁고 궁벽하다. 빨치산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소재와 농촌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독자들에게 닿기 힘든 시절 아닌가.

예상과 달리 이 소설은 순식간에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빨치산 출신 노인의 죽음을 맞이한 시골 장례식장 풍경이 웃음을 터져 나오게 하면서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심하게 훼손된 시신을 잘 갈무리한 일, 매 맞는 베트남 엄마 때문에 비뚤어질 결심을 한 다문화 소녀와 친구가 된 일 등 빈소에서 아버지의 지난날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대단한 문학적 자산을 지닌 정 작가의 뛰어난 문학적 기량이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잘 빚으면서 얻어낸 결과다.

이근미 작가
이근미 작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해온 온 동네 사람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 그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대학 강사와 작가의 삶을 개척해온 나, 두 사람은 빈소에 쏟아진 ‘사랑 폭탄’으로 끈끈하고 평범한 부녀로 재탄생한다. 한국 현대사와 농촌의 삶을 진하게 경험하면서 사람과 사랑을 깊이 되새기게 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