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헬라세포
과학과 의학의 역사를 바꿔놓은 '불멸의 세포'가 있다. 최초로 배양에 성공한 이 인간 세포는 70년간 전 세계 실험실에서 배양되며 11만 건 이상의 과학 논문, 1만 건 이상의 특허, 3건의 노벨상 수상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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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포 덕분에 소아마비 백신과 코로나19 백신, 암을 포함한 각종 질병에 대한 지식을 얻고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 세포는 우주로도 보내져 우주 환경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 세포의 이름은 ‘헬라(HeLa) 세포’(사진)다.

헨리에타 랙스
헨리에타 랙스
헬라 세포의 주인은 헨리에타 랙스(Henrietta Lacks)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다. 그의 이름과 성의 앞글자를 따서 헬라 세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담배 농장에서 일하면서 가정을 이뤘던 랙스는 1951년, 31세의 나이로 자궁경부암 판정을 받았다. 당시 그가 찾은 존스 홉킨스 병원은 지역에서 유일하게 아프리카계 미국인 환자를 진료해주는 병원이었다. 랙스는 라듐을 이용한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암은 전신으로 퍼졌고 결국 그해 사망했다.

문제는 의료진이 랙스의 암세포를 그의 동의 없이 채취해 배양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의사가 환자의 사례를 연구에 사용할 경우,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반드시 환자에게 알리고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절차가 없었고, 연구를 위해 세포를 샘플로 채취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랙스는 앞으로 자신의 세포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포는 몸 밖에서 며칠 내로 죽었기 때문에 배양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랙스의 세포는 몇 달이 지나도 죽지 않고 빠른 속도로 증식하고 성장했다. 이 세포가 다른 세포와 달리 ‘불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연구진은 다른 연구자들에게도 세포를 공유했고, 곧 전 세계로 퍼지며 70년간 수많은 과학과 의약학 발전에 기여했다. 지금까지 증식된 헬라 세포의 무게는 무려 5000만 톤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실험실에서 배양되고 있다.

수많은 생명공학 기업이 헬라 세포를 이용한 연구로 특허를 취득했고, 수조 원의 돈을 벌어들였다. 현대의 생명공학 및 의약학 산업은 헬라 세포를 기반으로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유족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수십 년간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졌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이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다 2010년 레베카 스클루트라는 작가가 10년간의 집요한 취재 끝에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을 출간하며 헬라 세포를 둘러싼 진실을 세상에 공개했다. 이 책은 오프라 윈프리가 출연하는 드라마로까지 제작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헬라 세포를 연구에 이용했던 몇몇 기업과 연구기관은 그제야 스클루트가 설립한 ‘헨리에타 랙스 재단’에 기부금을 전달했다.

대중의 지지를 얻은 랙스의 유족들은 헬라 세포를 사용하고 이익을 얻은 기업과 기관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중에는 헬라 세포를 전 세계 실험실에 판매한 생명공학 기업 ‘서모 피셔 사이언티픽(Thermo Fisher Scientific)’이 있었다. 서모 피셔 사이언티픽은 공소시효가 이미 만료됐다며 여러 차례 소송을 기각하려고 했지만, 유족은 헬라 세포가 여전히 쓰이고 있기에 그들의 주장은 억지라며 반박했다. 그리고 2023년 8월 1일, 2년간의 소송 끝에 합의가 이뤄졌다. 합의 조건은 기밀에 부쳐졌지만, 양쪽 모두 만족할 만한 합의에 이르렀다는 소식이다. 유족 측 변호사는 “헨리에타 랙스의 이야기는 미국 내 연구 및 의료 역사에 감춰진 인종적 불평등을 잘 보여준다”라며 수 세기에 걸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겪은 인종 차별의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헨리에타 랙스에게 ‘WHO 사무총장 상’을 사후 수여했다. 그는 “헨리에타 랙스를 기리는 것은 과거의 과학적 불공정을 반성하고, 보건 및 과학 분야에서 인종적 평등을 중요하게 여기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헬라 세포를 둘러싼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의료 및 연구 윤리, 신체조직과 같은 생물학적 정보의 소유권이나 통제권의 문제, 불평등과 차별, 과학자의 책임 등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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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헨리에타 랙스에게 ‘WHO 사무총장 상’을 사후 수여했다. 그는 “헨리에타 랙스를 기리는 것은 과거의 과학적 불공정을 반성하고, 보건 및 과학 분야에서 인종적 평등을 중요하게 여기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헬라 세포를 둘러싼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의료 및 연구 윤리, 신체조직과 같은 생물학적 정보의 소유권이나 통제권의 문제, 불평등과 차별, 과학자의 책임 등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오혜진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