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김수빈 <고요한 우연>
1학년 9반 25번 이수현, 이름조차 흔해 A, B로 구분해야 할 때도 있었다. 모든 게 평범하다. 잘하는 게 있다면 노트 필기의 달인이고 노트를 잘 빌려준다는 점이다. 자신이 조금 시시하고 재미없긴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주 보통의 고등학생일 뿐이다. 한정후를 보면 가슴 설레고 웃음이 나는 소녀이기도 하다.언제나 그렇듯 눈에 띄게 예쁘지도 탁월하지도 않은 아이가 에이스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자기 위치를 잘 아는 수현은 그것도 쿨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정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 작품인 <고요한 우연>은 당연히 평범한 수현의 지루한 일상을 그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눈치 빠르고 상상력이 풍부한 수현이 자신의 촉수에 걸려든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어디까지 이어나가는지 흥미롭게 펼치는 작품이다.
수현의 관심을 끄는 또 한 사람 은고요.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이 교문 앞에서 기다릴 만큼 예쁜 데다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을 만큼 똑똑하다. 사생활에 대한 여러 소문이 있으나 은고요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은고요와 친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지만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냉랭하기만 하다. 그러자 일단의 아이들이 고요를 괴롭히기 시작하고 그럴 때마다 고요를 지켜주는 한정후. 착한 수현은 질투하기보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알게 된 비밀 계정 한정후를 좋아하면서 은고요에게도 관심이 지대한 수현이 고요에게 친절을 베풀지만 돌아오는 건 역시 무반응이다. 고요의 냉대를 당연하게 여기는 답답한 수현의 옆을 정말 좋은 친구 지아가 지키고 있다. 지아는 한정후의 반응을 보며 수현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는 식으로 기를 살려주지만, 주제 파악을 잘하는 수현은 친구의 달콤한 위로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수현의 눈에 들어온 또 한 아이 이우연.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핸드폰을 두 개 사용하고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도 알게 된다.
한 교실에서 공부하지만 정말 친한 한두 명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정후와 고요와 우연에게 관심이 많은 수현이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기회가 생긴다.
교실에 떨어진 우연의 핸드폰에서 아이디를 보게 되었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고요의 바다’라는 계정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팔로 요청을 수락하면서 계정의 주인은 자신을 ‘바다’로 부르라고 한다. 수현은 팔로워 목록에서 이우연으로 짐작되는 사람의 계정도 찾는다. 모르는 사람끼리 나누는 따뜻한 대화요즘 대개의 사람들은 두 개의 삶을 살고 있다. 현실에서 보이는 삶과 SNS에서의 삶.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낸 계정이라면 오프라인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비밀 계정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계정에서의 그는 달의 앞면과 뒷면처럼 다르다.
수현은 고요의 바다 계정 주인인 바다가 누군지 모르는 가운데 속 깊은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이우연과도 공통의 관심사인 고양이에 대해 대화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가 은고요라는 걸 알게 된 수현은 충격을 받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화를 계속한다. 내친김에 수현은 정후의 오픈된 SNS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들어가 대화를 요청한다.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하루 종일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서는 서로에게 무심하면서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가상의 공간에서 속내를 털어놓고 살갑게 지내는 일. 이게 요즘 우리들의 삶이다. 교실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수현과 우연은 마치 10년 지기라도 된 듯 고민을 토로하고 응대한다. 차갑기 이를 데 없는 고요는 상대가 수현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늘 밝기만 한 정후도 집안의 어두운 얘기를 털어놓는다.
착한 이수현은 우연과 고요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좋아하는 한정후에게 “언제까지든 대나무 숲이 되어줄게요”라고 다짐한다.
고요와 우연, 정후에게 수현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일이 생긴다. 온라인 속에서 다진 우정은 현실과 연계가 될까. 차가운 고요, 시크한 우연, 친절한 정후의 반응이 각각 다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두 개, 혹은 세 개의 세상을 사는 지금. 평범하지만 따뜻한 수현의 삶이 오늘을 사는 많은 이들의 마음이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