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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8요일이 주는 희망

    폴란드 작가 마렉 플라스코의 <8요일>이 2003년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제목은 <제8요일>이었다. ‘8요일’이든 ‘제8요일’이든 포털에서 검색하면 영화 <제8요일> 관련 내용이 일제히 뜬다. 소설 <8요일>과 영화 <제8요일>은 제목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스토리다.마렉 플라스코는 1950년대의 암울한 폴란드를 배경으로 인간 본질의 문제를 심도 있게 파헤친 <8요일>을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발표했다.‘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갈망의 요일’이라는 점이 각인되면서 <8요일>은 출간 즉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게오르규의 <25시>와 쌍벽을 이루는 획기적인 제목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뒷받침되면서 여전히 많은 독자가 찾고 있다. 특히 청년들에게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전쟁과 이념 다툼으로 혼란에 휩싸인 나라가 여전히 많은 데다 불확실한 미래로 인한 방황의 시기여서 그럴 것이다. 사방이 꽉 막힌 삶 속에서 열망하는 벽마치 한 번쯤 만난 듯한 인물 아그네시카는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 가난한 형편에 자기 방이 없어 여대생임에도 부모와 함께 지낸다.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해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그녀의 어머니는 침대에 누워 히스테리를 사방으로 발사한다. 무기력한 아버지가 급기야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을 거야. 어디로 꺼져버리든지, 뒈져 버리든지 하라니까! 이대로 가다간 내가 미쳐버리겠어! 내가 결판을 내든지 해야지!”라고 소리 지를 정도로 숨 막히는 집안이다.아그네시카의 오빠 구제고지의 침대는 부엌 한쪽에 놓여 있다. 또 하나의 침대는 좁고 너저분한 부엌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자와즈키라는 남자의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절망속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우정·사랑

    <키친>은 요시모토 바나나가 24세 때인 1988년에 발표한 데뷔작이다. 이 작품으로 카이엔 신인문학상과 이즈미 쿄카상을 받았으며, 세계 18개국에서 번역되어 250만 부가 넘는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일상 언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문체에 친밀감 있는 표현’으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주목받으면서 ‘요시모토 바나나 현상’이라는 용어가 생기기도 했다.<키친>은 세 개의 단편 ‘키친’, ‘만월’, ‘달빛 그림자’로 구성되었다. ‘만월’은 ‘키친’의 주인공들이 몇 달 후에 겪는 일을 그려 ‘키친’과 ‘만월’은 한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부엌’인 사쿠라이 미카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가 죽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속에서 지낸다. 할머니는 결국 휴학 중인 미카게의 곁을 떠나고 만다. 부엌에서 절망하며 뒹굴뒹굴 자고 있을 때 “기적이 찹쌀 경단처럼 찾아온 그 오후”,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한 살 아래 남자가 나타난다.다나베 유이치가 아르바이트하던 꽃집에 할머니가 자주 들러 꽃을 사 갔다고는 하지만 “당분간 우리 집에 와 있으라”는 제안 앞에서 미카게는 어안이 벙벙하다. 그날부터 미카게는 유이치와 그의 어머니 에리코와 함께 지낸다. 미카게는 6개월간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거실의 푹신한 소파에서 잠들며 조금씩 슬픔을 이겨낸다. 인생이란 한 번은 절망해봐야 알아유이치를 혼자 키우며 힘든 일을 많이 겪은 에리코는 미카게에게 “정말 홀로서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뭘 기르는 게 좋아.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일과 결혼,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 대한 물음

    영국 작가 애니타 브루크너의 소설 은 세계 3대 문학상에 꼽히는 부커상 수상작이다. 여성 최초 케임브리지대학교 슬레이드 석좌교수를 지낸 애니타 브루크너는 ‘좀 심심해서’ 53세에 처음 소설을 썼다. 첫 소설이 호평받자 매년 소설을 냈고, 네 번째 작품 으로 문학성은 물론 대중성까지 확보했다. 1984년 9월 출간된 은 그해에만 5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이후 BBC에서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은 아주 재미있다. “진정한 고전, 지금부터 100년 동안 모든 사람이 즐겨 읽을 작품”이라는 서평대로 흥미로우면서 의미 있다. 섬세한 심리묘사를 곁들여 논하는 사랑과 일이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심화된다고 해도 사람들의 본질적인 마음가짐과 삶의 질서는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게 분명하다. 재미있지만 책장이 술술 넘어가지 않는 점이 매력이다. 사람들의 마음, 미묘한 감정을 대변하는 주변 풍경, 핵심을 찌르는 대화를 격조 있게 풀어내는 장면에서 쉬어가며 음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스토리만 이해하며 휙휙 넘기는 책들과 다른 품위와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소설이다. 결혼식 대신 한적한 호텔로 온 작가의 주인공인 서른아홉 살 이디스 호프는 로맨스 소설 작가로 꽤 성공했다. 부인이 있는 데이비드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녀는 그에게 미련이 남아 있음에도 놓치면 안 된다는 친구의 부추김에 제프리와 결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결혼식 날 차를 돌려 식장에 가지 않았고, 피신하다시피 호텔 뒤락으로 온다. 사람들과 부딪치고 싶지 않던 이디스는 휴가철이 지나 투숙객이 별로 없는 호텔 뒤락에서 마음을 정리하며 글을 쓰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분노와 방황 속에서도 사랑을 갈망하는 여인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1949년 5월 25일 서인도제도의 안티과섬에서 태어났다. 의 주인공 루시도 1949년 5월 25일생이다. 소설은 작가의 경험이 요소요소에 녹아들기 마련인데, 책장을 조금만 넘기면 루시가 곧 저메이카 킨케이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시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킨케이드가 힘든 시간을 보냈기에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카리브계 여성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첫 장편소설 은 안티과섬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엄마와의 애증 관계를 강렬하게 그린 작품이다. 은 애니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로 끝을 맺는다. 5년 후 펴낸 는 주인공이 고향을 떠나 미국에 도착하는 날로 시작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다르지만, 는 의 후속 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부모의 외면과 ‘악마’라는 이름루이스와 머라이어 부부의 네 자녀를 돌보며 아무런 기대도 없이 살아가는 19세의 루시. 상하수도 시설이 없는 가난한 집에서 자란 루시는 ‘서로 사랑하는 가족, 풍족한 먹을거리, 조화로운 환경’ 속에 머물게 됐지만 마음이 늘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녀는 부모와 함께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는 페기와 함께 남자를 만나고 마리화나를 피워대는 것으로 분을 달랜다. 루시의 마음을 들끓게 만드는 그의 부모와 가난한 고향은 그리움과 증오라는 양가감정으로 그녀를 괴롭힌다. 아홉 살까지 외동이던 루시는 이후 5년 동안 남동생 셋이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다. 아빠는 그렇다 쳐도 엄마까지 아들만 바라보는 상황에서 루시는 가족과의 절연을 계획한다. 엄마로부터 “악마 이름을 붙인 거야. 루시는 루시퍼를 줄인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어려운 경제를 재미있는 로맨스 소설로 풀어내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소설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재탄생하다. 의 표지에 소개된 문구다. 애덤 스미스의 저서 은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한 최초의 경제학 저서로 잘 알려져 있다. 은 자신의 이익 추구에만 여념이 없는 경제인의 주체적 행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국부의 증진과 생산력 향상을 가져온다고 주장한 책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다른 말로 ‘시장을 움직이는 힘’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소비하는 수많은 상품을 얼마나 생산해야 할지 결정하는 일, 생산자가 폭리를 취하는 걸 막는 일, 모두 쉬운 문제가 아니다. 230여 년 전에 애덤 스미스는 개인이나 정치권력이 아닌 시장(market)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설명하는 건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팟캐스트를 통해 쉬운 경제학을 알리는 스탠퍼드대학의 러셀 로버츠 교수는 이 책을 집필하고 출판하는 과정이 몹시 어려웠다고 한다. 서문에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거부당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경제이론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는 데다 경제를 쉽게 알리는 게 힘들다는 방증이다. 경제학과 문학의 충돌5년여의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온 은 MIT대학 출판부에서 유일하게 출판된 경제 로맨스 소설로, 현재 미국 여러 대학이 경제학 토론 교재로 사용하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격찬한 책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은 로맨스 소설 형태로 기술해 술술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주인공은 워싱턴의 사립 명문 에드워드고등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샘과 문학 교사 로라. 자본주의 체제의 신봉자인 샘과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온라인에서 쌓은 우정, 현실에서도 계속될까

    1학년 9반 25번 이수현, 이름조차 흔해 A, B로 구분해야 할 때도 있었다. 모든 게 평범하다. 잘하는 게 있다면 노트 필기의 달인이고 노트를 잘 빌려준다는 점이다. 자신이 조금 시시하고 재미없긴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주 보통의 고등학생일 뿐이다. 한정후를 보면 가슴 설레고 웃음이 나는 소녀이기도 하다. 언제나 그렇듯 눈에 띄게 예쁘지도 탁월하지도 않은 아이가 에이스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자기 위치를 잘 아는 수현은 그것도 쿨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정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 작품인 은 당연히 평범한 수현의 지루한 일상을 그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눈치 빠르고 상상력이 풍부한 수현이 자신의 촉수에 걸려든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어디까지 이어나가는지 흥미롭게 펼치는 작품이다. 수현의 관심을 끄는 또 한 사람 은고요.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이 교문 앞에서 기다릴 만큼 예쁜 데다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을 만큼 똑똑하다. 사생활에 대한 여러 소문이 있으나 은고요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은고요와 친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지만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냉랭하기만 하다. 그러자 일단의 아이들이 고요를 괴롭히기 시작하고 그럴 때마다 고요를 지켜주는 한정후. 착한 수현은 질투하기보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알게 된 비밀 계정한정후를 좋아하면서 은고요에게도 관심이 지대한 수현이 고요에게 친절을 베풀지만 돌아오는 건 역시 무반응이다. 고요의 냉대를 당연하게 여기는 답답한 수현의 옆을 정말 좋은 친구 지아가 지키고 있다. 지아는 한정후의 반응을 보며 수현을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물리치기 힘든 유혹,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리어카를 끌며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와 살고 있는 중학생 남자아이 현정인. 어릴 때부터 할머니를 도운 정인에게는 길을 걸을 때 땅바닥을 쳐다보며 돈이 될 만한 폐지를 줍는 습관이 있다. 일주일에 사흘은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열심히 살아도 수학여행 비용을 마련하기 힘들다. 비싼 운동화를 꺾어 신고 다니는 태주와 그 일행은 낡은 운동화를 신을 수밖에 없는 정인을 놀리고 괴롭힌다. 가난한 아이, 괴롭히는 일당들, 흔히 봐온 구도를 는 어떻게 풀어갈까. 고양이와 검정 옷을 두른 남자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악마가 정인에게 접근해 근사한 제안을 하고, 달콤한 유혹 앞에서 정인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나혜림 작가가 쓴 는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우선 이 소설은 여타의 청소년 소설과 달리 교양을 쌓을 만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용어는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검색 가능한 실제 용어들이다. 우선 정인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 이름 ‘햄버거 힐’만 해도 여러 정보와 함께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까만 옷을 입은 악마 헬렐 벤 샤하르, 소돔의 사과, 최고급 코스 요리, 샤토 페트뤼스 와인, 파우스트, 성경적 상황과 구절 등 책을 읽다 보면 상식과 지식을 두루 섭렵하게 된다. 악마의 감미로운 제안을 받지만또한 대다수 청소년 소설의 건조한 문장과 달리 음미할 만한 문장이 계속 등장해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를 들어 을씨년스러운 집 안에서 혼란을 겪는 과정을 “한 칸짜리 집에는 갈등을 넣어둘 수납공간이 없다”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햇빛은 작열하며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노동하게 하지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짧고 가벼운 이야기에 담긴 묵직한 삶의 교훈

    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유일한 단편집이자 마지막 완성작이다. 어머니와 연인 및 친구들의 죽음, 신경 발작으로 인한 건강 문제와 경제적 위기라는 고통 속에서 작가로서 능력에 회의를 느끼던 플로베르에게 친구 투르게네프가 “짧고 가벼운 이야기를 써보라”고 조언했다. 끝내 완성하지 못한 를 밀쳐 두고 고향인 루앙의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친숙한 이야기를 소재로 을 완성했다. 뒤이어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리며 을 썼고, 옛 메모들을 들춰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살로메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소재로 를 집필했다. 서로 다른 이야기는 각각 완결성을 가지면서도 순으로 읽으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주제가 하나로 모인다. 첫사랑에 배신당한 펠리시테의 무한 사랑특히 중편소설 은 ‘모든 것이 나를 위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요즘 세상에 많은 울림을 준다. 주인공 펠리시테는 부모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 형제들과도 헤어져 농사꾼의 집에서 암소 돌보는 일, 닭 보는 일을 하며 산다. 18세 때 축제에 갔다가 테오도르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테오도르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해 버린다. 슬픔에 빠져 헤매던 펠리시테는 오벵 부인을 만나 그 집의 하녀로 들어간다. 펠리시테는 오벵 부인의 자녀 폴과 비르지니를 몹시 사랑하며 온 동네에 소문이 날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 오벵 부인과 두 자녀가 소에 쫓겨 위험에 처했을 때 온몸으로 막아 낼 정도로 충성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하녀 펠리시테와 늘 거리를 두는 오벵 부인은 그녀의 열심을 당연하게 여긴다. 오벵 부인의 아들 폴이 외지의 중학교에 가게 되자 펠리시테는 몹시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