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투키디데스의 함정

작은 폴리스 간 내전에서 시작
아테네·스파르타 대결로 번져
페르시아, 힘 빠진 그리스 장악

21세기 발칸반도 미래 몰라도
한반도에선 주변국 말려들 수도
오스트리아 의회 건물 앞의 투키디데스 조형물. ‘펠로폰네소스전쟁사’는 후대인이 붙인 제목이고 원제목은 ‘영원한 소유’였다. 책장에 꽂아 두고 영원히 간직하라는, 교만이 강물처럼 흐르는 제목이다.  Getty Images Bank
오스트리아 의회 건물 앞의 투키디데스 조형물. ‘펠로폰네소스전쟁사’는 후대인이 붙인 제목이고 원제목은 ‘영원한 소유’였다. 책장에 꽂아 두고 영원히 간직하라는, 교만이 강물처럼 흐르는 제목이다. Getty Images Bank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가 암살당했을 때 이 사건이 세계대전으로 번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달 뒤 일곱 나라가 연달아 선전포고를 주고받으며 상황이 험악해졌을 때도 전쟁이 해를 넘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전선으로 가는 군용열차 앞에서 젊은이들은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약간 ‘빡센’ 군사훈련 정도로 여긴 전쟁은 그러나 5년을 끌면서 지옥이 됐고, 전선에 투입된 병사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촉이 좋은 사람이다. 그는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오래된 책 한 권을 불러냈다. 고대 그리스 내전을 다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전쟁사>다. 깜찍하게도 토인비는 그 오래된 전쟁에서 세계대전의 원인을 찾아냈다. 급부상하는 독일이 기존 패권국인 영국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준 끝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설명이었다.

국제정치학이라는 학문이 걸음마 단계이던 시절이다. 가설로는 그럴듯했지만 어딘지 어설펐던 그의 주장은 제2차 대전을 거치고 냉전이 펼쳐지면서 우세 학설이 된다. 기존 패권국이 신흥 강국의 팽창을 견디지 못한다는 이 이론은 저자의 이름을 따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 불렸고, 현재는 주로 미·중 갈등을 염려할 때 동원된다. 개인적으로는 살짝 마뜩잖다. 영국과 미국처럼 평화적인 패권 이양이 이뤄진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앵글로색슨 대서양 동맹 사이에서 벌어진 예외적인 상황이다. 예부터 패권국과 후발 강국의 군사적 충돌은 늘 있었고, 이를 피해 간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표현보다는 ‘투키디데스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당하다는 생각이다.

차라리 함정은 전쟁의 다른 측면에 더 어울린다. 그것은 ‘말려들어 가는’ 것이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은 그리스 북쪽의 작은 폴리스 에피담노스(현재 알바니아의 두러스)의 내전에서 시작됐다. 평민파와 귀족파의 사소한 갈등이었지만, 여기에 케르키라(현재 코르푸 섬)와 코린토스라는 중급 폴리스가 말려들어 가고 최상위 포식자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뛰어들면서 초대형 동맹 전쟁이 된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되고 급기야 가문의 대결로 발전한 것이다.

이들이 말려들어 간 과정을 보자. 에피담노스는 케르키라가 건설한 폴리스다. 한편 케르키라의 모(母)폴리스는 코린토스다. 그러니까 아래부터 족보가 에피담노스→케르키라→코린토스 순이다. 에피담노스의 평민파가 케르키라에 도움을 청했을 때 귀족정 케르키라는 이를 거절한다. 다급해진 평민파는 코린토스에 달려갔고 나라를 통째로 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말하자면 손녀가 할머니에게 구조 요청을 한 셈이고, 할머니는 이익에 설득된다. 코린토스와 케르키라는 사이 나쁜 모녀였다. 코린토스가 부과하는 세금이 많다며 케르키라가 멋대로 독립해 버렸기 때문인데, 이참에 코린토스는 케르키라의 버릇을 고쳐 주기로 결심한다.

의욕과 실력은 별개였고 코린토스는 참패한다. 이후 해군을 강화한 코린토스에 불안감을 느낀 케르키라는 아테네로 달려갔고, 아테네와 케르키라의 해군력을 합치면 그리스 최고의 군사동맹이 된다며 이익에 호소한다. 코린토스는 스파르타의 체면과 자존심을 자극했다. 무적의 군사 강국이라더니 아테네의 부상을 보고만 있을 거냐며 이죽거렸다. 이렇게 이익과 체면과 두려움이 얽히면서 그리스 내전의 막이 오른다. 대체로 아테네가 밀리는 전황이었지만 숨통을 끊을 마지막 한 방이 필요했던 스파르타는 숙적 페르시아에 손을 내민다. 그 손에 페르시아는 황금을 잔뜩 쥐여 주었고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그리스 반도 전체의 재정은 바닥났고 페르시아는 이들을 속국처럼 주무른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을 ‘페르시아의 황금이 욕망을 실현한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21세기 에피담노스의 후보는 여럿이다. 발칸반도는 정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인종과 종교가 뒤섞여 있다. 이들은 서로를 악연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오래된 증오를 기꺼이 분출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확전의 여지는 불분명하다. 반면 한반도는 주변 국가들이 말려들어 갈 환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휴전선에서의 사소한 무력 충돌이 전면전으로 확대됐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에게 한·미 동맹이 있다면 북한에는 북·중 우호조약이 있다. 자동 개입이다. 미국은 이익과 체면에 떠밀려 참전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일본과 중국은 내일 당장 전쟁을 한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다. 청일·중일전쟁을 치렀고 현재도 남중국해에서 서로를 노려본다.

[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그리스 거덜 낸 펠로폰네소스전쟁…페르시아만 '빙긋'
그럼 중국과 러시아는 한통속일까. 별로 그렇지도 않다. 아편전쟁 당시 청나라는 러시아에 우수리강과 아무르강 동쪽의 영토를 내줬다. 규모가 100만㎢로 남한의 10배 규모다. 중국은 땅에 집착하는 나라다. 우호는 제한적이고 러시아는 뜻밖의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다소 과장해서 썼지만 세계대전 전야의 분위기도 ‘에이 설마…’였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을 ‘잔혹한 교사’라고 불렀다. 배움은 다 소중하지만 이 교사의 학생만큼은 피할 일이다. 20세기에도 한 차례 수업을 받았는데, 재수강하라 할까 봐 무서워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