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정부가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기로 했습니다. 클러스터는 특정 산업의 여러 기업과 관련 기관을 한데 모음으로써 이들이 흩어져 있을 때보다 더 활발하게 교류하고 협력해 더 좋은 성과를 내도록 하는 일종의 거대 산업단지입니다.정부는 경기 용인시에 710만㎡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기로 했는데요. 삼성전자가 2042년까지 20년간 총 300조원을 투자해 이곳에 파운드리 공장 5개를 지을 예정입니다. 파운드리는 반도체 설계전문기업인 팹리스가 주문하는 대로 반도체를 생산해주는 공정을 말합니다. 이를 반도체 수탁생산이라고 합니다. 현재 파운드리 세계 1위 기업은 대만 TSMC입니다. 이번 계획으로 파운드리 세계 2위인 삼성전자는 TSMC를 따라잡겠다는 목표입니다.
2018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에다 코로나19까지 거치면서 세계적으로 반도체 부족 현상이 심각해졌습니다. 그래서 시장 원리에 따라 각국이 분업체계를 갖춰 반도체를 생산하고 유통하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제 주요 국가는 경제를 넘어 국가 안보 차원에서 반도체의 패권을 차지하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와 삼성전자가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한 것입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알아봅시다. 다른 나라들의 반도체 클러스터 사례에서 우리의 이번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도 생각해봅시다.경제성을 기준으로 작동하던 반도체 공급망…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으로 재편되고 있어요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전자제품은 1947년 미국 벨 연구소에서 발명된 트랜지스터 덕분입니다. 트랜지스터의 발명으로 전자제품을 작게 만들면서 여러 기능을 실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더 다양한 기능을 담기 위해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쓰게 되자 여러 트랜지스터와 다른 전자 부품을 연결하는 부분이 늘어났고, 거기서 자꾸 고장이 생겼습니다. 이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실리콘 웨이퍼라는 반도체 위에 많은 트랜지스터와 전자 부품을 집어넣은 ‘집적회로(IC·Integrated Circuit)’가 등장했습니다. 여기서 반도체란 전기가 통하는 전도체와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의 중간적 물질을 말하고, 그런 특성을 지닌 실리콘(규소·Silicon)으로 만든 동그란 원형 판이 웨이퍼입니다.
1958년 미국 기업 텍사스인스트루먼트가 트랜지스터 4개를 실리콘 웨이퍼에 넣은 집적회로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일반적으로 반도체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반도체라는 전기적 특성이 제품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죠. 초기에는 한 기업이 반도체 설계부터 생산까지 모든 공정을 처리했고, 그런 기업을 종합반도체기업(IDM)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도체 공급망 형성반도체 제조 공정은 전공정과 후공정으로 나뉩니다. 간단히 말하면, 전공정에서 실리콘 웨이퍼에 전자회로를 그리고, 후공정에서는 실리콘 웨이퍼를 잘라서 포장하고 성능을 시험합니다. 전공정은 기술력이 높아야 하지만, 후공정은 기술력보다는 값싼 노동력이 중요합니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후공정을 다른 나라 기업에 맡겼고 그로 인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미국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반도체 설계전문기업인 팹리스가 등장했습니다. 팹리스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생산시설 없이 설계만 하는 회사입니다. 설계한 반도체를 IDM에 맡겨 생산했습니다. 경쟁자에 자신들의 아이디어가 담긴 설계도면을 넘겨야 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파운드리가 이런 상황을 해결했습니다. 1987년 TSMC를 설립한 모리스 창 회장은 “우리는 고객사와 경쟁하지 않는다”는 말로 팹리스를 안심시켰습니다.
반도체산업의 두 가지 축은 메모리반도체와 시스템반도체입니다. 메모리반도체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데 쓰이고, 시스템반도체는 정보를 빠르게 계산해서 처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1980년대 반도체 시장은 메모리반도체 중심이었는데 일본이 급성장하자 미국은 세 차례에 걸친 미·일 반도체 협정을 통해 일본의 반도체 제조업을 약화시켰습니다.
우리나라는 1983년 삼성전자가 64K D램을 개발해 메모리반도체에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TSMC를 앞세운 대만이 가세했고, 한국과 대만 기업들은 일본의 반도체 제조 장비와 소재 기업들에 의존하게 됐습니다. 결국 미국은 팹리스와 비메모리반도체, 대만은 파운드리, 한국은 메모리반도체 중심의 IDM, 일본은 반도체 제조 장비와 소재라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형성됐습니다. 반도체 공급망 재편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만들어진 이유는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TSMC는 영업이익률이 50%를 넘고, 삼성전자도 최근에는 약간 부진하긴 하지만 반도체 사업부문 영업이익률이 40%에 육박했습니다.
그런데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이 생기면서 반도체 공급망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중국이 빠르게 경제를 성장시키고 첨단산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자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첨단산업의 핵심 부품인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이 성장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경제성과 효율성을 기준으로 작동하던 반도체 공급망이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현재 삼성전자는 경기 화성과 평택, 중국 시안, 미국 오스틴 등에서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경기 이천과 청주, 중국 우시와 다롄 등에 공장이 있고, 미국에도 공장을 짓기로 한 상태입니다. 이번에 용인에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기로 한 우리의 전략이 반도체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어떤 효과를 낼지 주목됩니다. NIE 포인트1. 반도체 공급망이 만들어진 이유를 설명해보자.
2. 기존 반도체 공급망의 내용을 정리해보자.
3. 반도체 공급망이 변화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대만·미국·독일 등의 반도체 클러스터 성공은…'적극적인 정부 지원' 같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이번에 정부가 만들기로 한 것은 반도체 ‘클러스터’입니다. 언론에서는 이를 반도체 ‘산업단지’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클러스터(cluster)는 1990년 미국 학자 마이클 포터가 제안한 개념입니다. 이후 클러스터는 경제지리학과 산업경제학 등에서 학술 용어로 자리잡았고, 언론이나 정부 정책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됐습니다.
포터는 ‘클러스터는 특정 산업분야의 상호 연관된 기업과 기관의 지리적 집적체’라고 정의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클러스터는 부품, 기계, 서비스 등 특정 산업과 관련된 기업, 정부기관, 대학, 연구소, 교육훈련기관 등이 가까운 곳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생산적 기업 활동이 중요하지만 단순히 모여 있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그곳에서 생산적 기업 활동이 중심을 차지해야 합니다. 금융회사들이 모여 있는 금융가, 여러 극장이 집중돼 있는 극장가, 전자제품 판매장이 밀집한 전자상가, 생산 기능이 없는 가구거리 등은 특정 산업의 관련 기업이 가까운 곳에 모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는 생산적 기업 활동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산공정상 연계를 통한 이익 창출이나, 기술 정보의 확산을 통한 혁신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이와 달리 정보기술(IT) 분야의 기업이 몰려 있는 실리콘밸리나, 영화 제작사가 밀집한 할리우드는 기업 간에 복잡한 분업과 긴밀한 연계가 나타나므로 전형적인 클러스터에 해당합니다. 다만 기업들이 모여 있고 생산적 기업 활동이 이뤄지더라도 다양한 산업 분야가 함께 존재하는 공업지역은 클러스터로 볼 수 없습니다. 결국 ‘특정 산업으로 전문화되고 생산적 기업 활동이 활발해야 한다’는 점이 클러스터의 핵심입니다. 대만 반도체 클러스터반도체산업에서는 클러스터가 흔합니다. 대만의 경우 파운드리 세계 1위 업체인 TSMC를 중심으로 한 클러스터가 유명합니다. 대만은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 및 한국과 함께 세계 반도체산업을 주도해왔습니다.
대만 반도체산업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클러스터가 꼽힙니다. 대만 반도체 클러스터는 반도체산업의 네 가지 분야인 팹리스(반도체 설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메모리반도체, 후공정(포장과 성능 시험) 등이 조화롭게 포함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팹리스와 파운드리가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데요. 2021년 기준 세계 팹리스 톱10 기업 중에서 4개가 대만 기업이고, 나머지 6개는 모두 미국 기업입니다. 250여 개에 달하는 대만 팹리스 기업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공장 5개를 짓고, 경기 성남시 판교 등에 있는 팹리스와의 연계를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미국과 독일 반도체 클러스터삼성전자가 파운드리 공장을 운영 중인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은 과거 남부 노예도시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실리콘 힐’로 불리며 북미에서 반도체산업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유럽의 반도체 중심지로 떠오른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은 옛 동독 공산주의를 경험한 지역입니다. 지금은 ‘실리콘 색소니’라고 불립니다(색소니는 작센의 영어식 발음이고, 작센의 주도(州都)가 드레스덴입니다).
이들 클러스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북미 1위와 유럽 1위 반도체 클러스터로 성장하는 데 ‘강력한 정부의 역할’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오스틴 시정부와 드레스덴 시정부는 연구소와 관련 대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기업들의 사업 비용을 낮춰주기 위한 각종 정책을 시행했으며, 새로 이주해오는 반도체산업 인력이 편안하게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립된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이 성공하려면, 대만 사례처럼 팹리스와 파운드리 등 관련 기업이 긴밀히 연계하며 시너지를 내야 합니다. 또 미국과 독일의 사례처럼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반도체 클러스터가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NIE 포인트1. 클러스터의 개념을 설명해보자.
2. 대만 반도체 클러스터의 시사점을 정리해보자.
3. 클러스터 성공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생각해보자.
장경영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