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정유라 <말의 트렌드>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문제로 떠올랐다. 한 웹툰 작가가 사인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불편을 끼쳤다며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공지하자 네티즌이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고 심심한 사과를 하느냐’며 비난을 퍼부었다. 심심한(甚深, 깊고 간절한)을 ‘지루하고 재미없는’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의 한 래퍼는 ‘하루 이틀 삼일 사흘 일주일이 지나가’라는 가사를 써서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사흘을 4일째, 고지식(융통성 없음)을 높은(高) 지식, 금일(오늘)을 금요일로 아는 이들이 많다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탓하는 기성세대들은 ‘디지털 언어’ 앞에서 고전하는 중이다. ‘답정너, 자만추, 금사빠’를 겨우 익히면 ‘스불재, 닥눈삼, 드잘알’ 같은 뜻 모를 단어가 줄지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말의 트렌드>를 쓴 정유라 작가는 온라인 공간에서 매일 피고 지는 말의 풍경을 관찰하며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분석하는 빅데이터 전문가다. 저자는 ‘디지털 언어’를 ‘온라인 공간에서 발생해 그곳에서 사용되다가 우리 사회 전반으로 넘어온 언어’라고 정의했다.

저자는 ‘우리 언어의 문법이 바뀌었고, 우리 시대의 감수성이 변화했으니, 세대 간 소통이 이뤄지려면 디지털 언어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새로운 언어가 뿜어내는 신선한 에너지를 흡수해 실생활에서 순환시킨다면 우리의 언어 습관과 감각이 밝아질 것이라는 저자는 ‘늙는 것보다 낡은 것이 더 위험한 시대’임을 환기시킨다. 새로운 언어 감수성 키우기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문법과 감수성 변화가 디지털 언어 부른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돼 있는데, 1부에서는 새로운 언어가 어떤 법칙으로 만들어지고 확장되는지를 살펴본다. 각주 없이 등장할 정도로 평범해진 혼밥, 영끌, 덕질, 입덕, 먹방, 돈쭐 같은 단어만 따라가기도 바쁜데 별다줄(별 걸 다 줄인다)이 넘쳐나니 말의 트렌드를 따라가기가 숨가쁘다. 어쨌든 유행하는 말은 ‘줄임말로 가능한 한 짧게 말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2부는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언어화되는 사례를 다룬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행위가 운전이라면 21세기는 인증의 시대다. 진실은 인증할 수 있지만 인증이 곧 진실이라고 할 수 없는 가운데 우리는 타인의 인증으로 대리 경험하며 살고 있다. 인증을 잘해 유명 인플루언서가 된 몇몇이 뒷광고를 ‘내돈내산’으로 위장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광고’와 ‘#광고’의 간극, 해시태그의 위력을 간과해서 벌어진 일이다.

MZ세대의 언어 습관을 그들의 가치관과 연결해 살펴보는 3부에서는 지금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왜 그토록 취향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기록하고 꾸미는 일에 왜 그렇게 진심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4부에서는 새로운 언어 감수성 키우기 실천법을 담았다. 직장에서 상사들은 신입사원에게 말 붙이기 힘들다고 푸념인데 올바른 언어 습관을 가지려면 세 가지를 점검하라고 권한다. ‘이 말에 어떤 계층, 성별, 인종, 국가를 비하하거나 폄하할 의도가 담겨 있지는 않은가? 이 말의 반대말이 차별이나 혐오를 내포하지는 않는가? 이 말의 어원은 무엇인가.’ 단어장에 새로운 언어 기록저자는 단어장을 들고 다니면서 새로운 언어가 들리면 바로 기록한다. ‘카카오택시’를 교통의 언어에 추가하면서 ‘카택’를 동의어로 적고, ‘스터디 카페’를 장소의 언어에 추가하면서 동의어로 ‘스카’를 기입하는 식이다. 저자는 말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문어체도 구어체도 아닌 ‘디지털어체’가 우리 언어문화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글말, 입말이 아닌 키보드와 스마트폰의 자판을 터치해 탄생하는 ‘손말’이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 사회에 의미있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언어 속에 ‘트렌드 분석, 정책 수립, 지방자치단체 홍보, 기업 이미지 분석, 신상품 기획, 타깃 고객 분석’ 등등 사회 전반에 활용할 수 있으며, 관련 의사 결정에 도움을 주는 단서가 들어 있다.

“왜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해”라고 푸념하는 사이 ‘별다줄’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말의 트렌드를 놓치면 삶이 외곽으로 밀려날 수도 있다. 단어장을 준비해 부지런히 기록해야 얻는 게 많은 세상이 됐다. 디지털 언어와 문해력을 동시에 익힌다면 최강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