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디지털 경제와 기술발전
기술발전으로 인한 생산성 증가가 아니라 모두에게 도움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유인설계가 혁신의 핵심.
오직 생산성만이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 생산성은 더 적은 투입으로 더 많이 생산할 때 높아진다. 이를 담당하는 것이 기술이다. 기계를 도입해 노동생산성이 연간 2.5% 증가한다면, 1인당 생산량은 28년마다 두 배로 뛴다. 대략 절반만 일해도 평생 일해야 가능한 생산량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은 기술의 위력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생산성과 실업기술의 위력과 생산성이 소득 증대의 전제조건임은 분명하지만, 모든 서민의 소득 증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 발전으로 일자리를 잃는다면 누군가는 더욱 가난해질 수도 있다. 물론 경제학에서는 기술 발전으로 파레토 개선이 가능하다고 가정한다. 기계가 노동자의 일자리를 대체할 때 동시에 모든 사람이 더 많은 월급을 주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접근이지만, 기술 발전이 노동을 대체하는 개별 사례를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역사가 말해주듯, 기술은 물질적 수준을 높였지만 실업도 초래했다. ‘러다이트 운동’으로 표현되는 신기술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유럽과 중국 전역을 휩쓴 반란의 물결 가운데 아주 일부다. 19세기 말 이전 노동자들 저항은 예외가 아닌 표준이었다. 게다가 신기술에 대한 반란의 역사는 훨씬 길다. 로마제국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고용 문제로 인해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돌기둥을 운반할 때 기계 사용을 금지했다. 1589년 엘리자베스 1세도 기술 발전으로 인한 실업이 두려워 윌리엄 리에게 메리야스 편직기 특허를 내주지 않았다. 17세기 유럽에서는 많은 국가에서 자동직기를 금지했다. 자동직기를 도입한 지역에서는 어김없이 폭동이 뒤따랐던 탓이다. 대체 기술과 활성화 기술기술 발전은 분명 생산성을 높인다. 노동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칼 베네딕트 프레이는 기술이 얼마만큼의 실업을 유발할지는 활성화 기술인지 아니면 대체 기술인지에 달려 있다고 설명한다. 대체 기술은 기존 노동력이 제공하던 일과 기능을 쓸모없게 만든다. 반면 활성화 기술은 기존 업무를 더욱 생산적이게 만들거나 이전에 없던 새로운 일을 창출해낸다. ‘노동력 절감’은 이처럼 다른 의미로 쓰인다. 1929년의 철강 생산량을 1890년의 기술을 활용했다면 80만 명의 근로자가 추가로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1929년 철강 분야에서 80만 명의 실업자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증가했다. 기술은 필요한 노동력을 줄이는 동시에 수요 증가를 견인할 수 있었다. 유사한 사례는 많다. Stata와 Matlab, R과 같은 통계소프트웨어는 사회과학자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보다 뛰어난 분석가로 만들어줬다. 활성화 기술은 실업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근로자의 성과를 높인다. 해당 제품이나 서비스가 포화상태가 아니라면 말이다. 괜찮은 대안적 일자리자동화로 인한 불안은 새로운 일자리가 더 많아진다는 사실로 안심시킬 수 없다. 로봇공학자 일자리가 늘어났다는 사실이 조립 라인에 도입된 로봇에 의해 실직한 이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소득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직기 직공 일자리가 동력 직기 직공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수직기 직공의 소득은 거의 하락했다. 그렇다고 동력 직기 직공의 임금이 높았던 것도 아니다. 이들 임금이 오르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 새로운 기능을 습득해야 했고, 그 기능을 위한 노동시장이 발달해야 했기 때문이다.기술발전으로 인한 생산성 증가가 아니라 모두에게 도움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유인설계가 혁신의 핵심.
결국 해법은 ‘괜찮은 대안적 일자리’이다. 인쇄술의 발전이 필경사들을 집어삼킬 것이라 예상하지만, 직공과 달리 필경사들은 오히려 혜택을 봤다. 기술 발전 이후 책을 베껴 쓰는 분야를 인쇄기로 생산하기에는 경제성이 떨어지는 짧은 문서로 옮겼기 때문이다. 인쇄기 도입으로 인한 노동자 소요 사건이 매우 드문 이유다. 변화는 분명 혼란스럽지만, 결국에는 나에게도 이득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사람들은 혼란을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산업혁명 당시 기계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획기적인 기술의 등장이 아니라 반숙련 노동을 담당하는 중산층 일자리의 폭발적 증가였다. 경제학자들은 항상 장기적인 궁극적 효과만 이야기한다. 기술 진보로 인한 문제는 사회가 겪어야 하는 단기적 적응의 문제로 치부하는 시선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자칫하면 단기가 평생이 될 수도 있다는 점, 단기의 의사결정이 모여 장기가 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성장을 위해 기술 발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의미다. 디지털 전환의 한복판에 놓인 지금, 노동개혁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이유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