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디지털 경제와 현금

디지털 기술 발전으로 현금 비중 감소.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현금의 존재가 아닌 화폐에 대한 신뢰.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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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맥주왕 프레디 하이네켄이 납치됐다. 납치범들은 몸값으로 추적이 쉽고 교환이 어려운 고액권이 아니라 네 종류의 지폐(100네덜란드 길더, 100달러, 500프랑스 프랑, 100독일 마르크)로 약 2000만 달러를 요구했다. 준비된 돈은 400㎏에 육박했다. 자전거로 도주 계획을 세운 납치범들은 약 25%만 회수한 시점에 붙잡히고 말았다. 21일 만에 풀려난 하이네켄은 ‘그들이 나를 고문했어요. 칼스버그를 먹였다니까요!’라는 인터뷰로 건재함을 과시했다.고액권과 화폐신뢰많은 국가에서 고액권은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많이 활용되진 않는다. 오히려 지하경제에서는 자주 사용된다. 1달러 100만 장으로 100만달러를 구성하면 그 무게만 1t이 넘지만 500유로 지폐라면 2㎏에 불과하다. 실제 2004년 한 마약 운반책이 20만유로어치의 500유로짜리 지폐 다발을 삼킨 채 콜롬비아로 가다 붙잡히기도 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고액권 화폐 발행을 중단하기도 했다. 2000년 캐나다는 1000달러 발행을 중단했고, 싱가포르는 2014년 1만달러 발행을 중단했다. 하지만 옌스 바이트만 분데스방크 총재는 고액권 지폐 발행을 중단하면 다른 지폐에도 유사한 조치가 취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조성된다고 주장했다. 500유로 지폐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으면 200유로도, 100유로 지폐도 거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생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금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깨질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 화폐에 대한 신뢰 하락은 엄청난 통화가치 급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09년 11월 북학은 갑작스러운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지폐에서 0을 2개씩 뺀 다음, 구권 지폐를 법정 통화에서 제외하고 신권으로 교환 가능한 화폐 수량을 제한했다. 엄청난 액수의 저축이 사라져버렸고, 1주일 뒤에야 신권이 유통돼 북한 경제는 해당 기간 완전히 멈춰 있었다. 그 결과 환율이 30원에서 8500원으로 치솟는 통화가치 급락이 발생했다.현금 없는 사회오늘날 많은 경우 고액권을 넘어 현금 자체가 필요 없어졌다. 지난 20년간 탈현금 트렌드는 각국의 커다란 흐름이 돼왔다. 하지만 완전히 현금이 사라진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지폐를 도입한 국가이자, 가장 먼저 탈현금 트렌드를 견인하는 스웨덴에서는 현금 결제 비중이 13%에 미치지 않는다. 유통 중인 총통화는 2005년 국내총생산(GDP)의 4%에서 1%로 감소했다. 그럼에도 경제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돈과 현금은 다르기 때문이다. 현금에는 비용이 수반된다. 지폐를 인쇄하고 동전을 찍어내는 비용뿐만 아니라 현금을 수송하고 유통하며,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관리하는 제반 비용이 포함된다. 현금 때문에 발생하는 비용은 세계 GDP의 0.2~0.4%로 추산한다. 따라서 실제로 현금이 사라진다면 긍정적인 요인이 많다. 물론 금융시스템이 존속하는 데도 문제가 없다. 물리적 현금이 중앙은행 시스템을 유지하는 핵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리적 화폐가 사라져도 달러나 유로, 파운드, 엔 등 온갖 통화로 돈을 은행에 예치할 수 있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전자결제를 선호하다 보니 전력과 통신망이 안정적이라면 현금이 없어도 세상 돌아가는 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현금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현금의 필요성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여전히 현금이 쓰이는 이유는 현금이 가장 보편적인 결제 수단이기 때문이다. 현금이 있으면 카드나 스마트폰, 컴퓨터, 5G 통신 등은 필요하지 않다.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안정적인 결제 시스템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소외시킨다면 결코 좋은 시스템이라 평가할 수 없다. 게다가 시스템이 완전히 디지털화돼버린다면 누군가 결제 시스템을 차단하는 것만으로도 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따라서 스웨덴에서는 현금 보전을 위한 법률이 발효됐다. 영국도 비슷하다. 이들 법안은 디지털 약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결제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목적을 반영한다. 또한 시스템에 중대한 문제가 생겨도 지불이나 결제가 가능해야 한다는 점을 포함한다. 오늘날 다양한 핀테크가 금융 격차의 대안으로 거론되지만, 한편에서는 오히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의 금융 접근성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게다가 현금이 없다면 아이들 경제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기술 발전은 현금 없는 사회가 가능하다고 강조하지만, 어쩌면 다소 과장된 자신감일지 모른다. 물론 현금의 비중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화폐에 대한 신뢰임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