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김선영《 붉은 무늬 상자 》
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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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 살던 열일곱 살 난 딸이 죽었단다.”

갑자기 차를 세우고 둘러봤던 폐가를 구입한 엄마가 들려준 말이다. 세간살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으스스한 한옥, 마루 한가운데 놓여 있는 허옇게 빛이 바랜 여자 구두, 등짝이 선득해지는 장면이다. 이어서 발견한 붉은 나무 상자, 뚜껑을 여는 순간 비밀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붉은 무늬 상자》는 초강력 베스트셀러 《시간을 파는 상점》을 쓴 김선영 작가의 최신작이다. 참신한 스토리와 섬세한 문장으로 청소년소설의 품격을 높인 작가가 이번에는 스릴러와 추리 기법에 묵직한 질문을 담아 찾아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둑어둑한 저녁, 텅 빈 집에서 읽기 시작한다면 재미와 감동과 오싹함이 배가 될 것이다. 아토피 치료를 위해 작은 산골 중학교로 전학 온 여학생 김벼리. 어릴 때부터 아토피 피부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지만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강한 정신력으로 잘 이겨냈다. 원주민 아이들의 텃세에다 자기들끼리 공유하는 소문에 끼어들기 힘들지만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한마디로 쿨한 소녀다. 오래된 다이어리에서 발견한 진실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끝나지 않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소녀들의 용기
김선영 작가가 소설을 통해 하려는 얘기는 ‘진정한 용기’에 관한 것이다. 어떤 상황을 목격했으면서도 “묻지 않아 답하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 나서지 않았다”고 하면 상관없는 걸까? 스스로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며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벼리는 전학 온 첫날부터 친절하게 대해준 세나가 좋지 않은 소문에 시달리는 걸 알고 거리를 둔다. 지친 세나가 행여 나쁜 선택을 할지 몰라 걱정하면서도 다른 아이들의 눈총을 받고 싶지는 않다. 개학을 하고 사흘이 지났는데도 세나가 나타나지 않자 벼리는 문자를 보낸다. 문자로 섭섭함을 토로한 세나와 벼리는 다시 의기투합하고 붉은 무늬 상자를 함께 열어보기로 한다. 상자에서 발견한 다이어리 속 일기의 주인은 강여울, 충격적인 내용이 펼쳐진다. 생활지도부원이 되어 규율을 지키지 않은 아이들을 감시하게 된 여울과 무진이 슬리퍼를 끌고 오는 전학생을 지적하자 오히려 기세등등해서 덤빈다. 몇 번의 충돌이 연이어 일어난 뒤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퍼진다. 생활지도부장 국어샘과 여울, 무진이 삼각관계라는 말도 안 되는 구도와 함께 입에 담을 수 없는 낙서가 남자 화장실에서 발견된 것이다.

비슷한 소문에 시달리는 세나가 걱정되는 벼리, 여울의 억울한 상황을 보며 오히려 힘을 내는 세나. 둘은 여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전학생이 학교의 자랑인 고현이라는 사실에서 경악한다. 톱스타가 된 고현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의 첫사랑은 하늘나라로 떠났다”는 가증스러운 발언을 한다.

여울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세나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라도 벼리는 용기를 낸다. 고현이 여울 언니에게 사과하도록 만드는 게 목표다. 폐가의 재건 과정을 사진에 담아 블로그에 열심히 게재하던 벼리는 ‘붉은 상자’ 코너를 만들어 여울의 억울함을 조심스럽게 알린다. 제보자의 “그때 나서지 않은 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지금은 너무나 잘 알죠. 그때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괜히 나섰다가 그런 식의 말이 나에게도 튈까 봐 다들 겁먹은 분위기였어요”라는 고백에 벼리는 더욱 용기를 낸다. 평범한 사람들의 동참 혹은 방관현실에서도 과거 학교폭력 사건이 들통나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톱스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기록이 고스란히 남는 세상, 어릴 때부터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친구가 괴롭힘당할 때 외면했던 일로 마음 아픈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된다. 홀로코스트에서 대학살을 주관한 아이히만이 친절하고 평범한 사람이어서 충격받은 아렌트는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을 정립했다. 학교나 직
이근미 작가
이근미 작가
장에서 누가 따돌림을 당할 때 구성원들은 기계적으로 분위기에 휩쓸려 악행에 동참하게 된다는데, 이들은 대개 평범한 사람이라고 한다.

김선영 작가는 후기에서 ‘죽을 것처럼 무섭고 힘들지만 용기를 내야 할 곳에서 용기를 내 폭력의 감시자가 된다면 폭력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라고 질문한다. 벼리를 비롯한 여러 친구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과감하게 나서는 흥미진진하지만 서늘한 《붉은 무늬 상자》 속으로 들어가면 용기에 대해 저절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