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고려의 멸망과 개혁의 의미 下
고려 신진사대부들의 산실인 성균관.
고려 신진사대부들의 산실인 성균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고려의 멸망을 재촉한 예기치 않은 사건이었다. 명나라는 건국 초기의 불안했던 정세가 안정되자 고려의 요동 진출 가능성을 우려했다. 실제로 공민왕은 1369년과 1370년 요동 지역의 동녕부를 공격했고, 이때 고구려의 수도권인 환인의 오녀산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남은 북원의 세력을 완전하게 토벌하자 명나라는 요동지역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했고, 고려에 1388년 원나라에서 되찾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요구했다. 위화도 회군과 개혁의 시작
조선총독부가 말기에 조직적으로 파괴한 고적 가운데 하나로 파괴된 황산대첩비.
조선총독부가 말기에 조직적으로 파괴한 고적 가운데 하나로 파괴된 황산대첩비.
고려와 명나라의 위상을 결정짓는 사건을 놓고 정부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요동 지역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는 논리를 펴는 실권자인 최영의 주장대로 요동 정벌이 결정됐다. 이미 두 차례 요동작전을 펼쳤고 당시의 불확실한 국제정세, 추후 명나라와의 관계 등을 고려하면 최영의 판단은 무모하지 않았다.

반대파였던 이성계는 5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발해 음력 5월 7일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했다. 하지만 물의 범람을 핑계로 14일 동안 도하를 미루다가 ‘4불가론’을 내세웠다. 그 가운데 첫째가 이후 조선의 정책과 사대부들의 인식에 굴레를 씌웠고, 바로 지금껏 우리 뇌리에 박힌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以小逆大)’는 문구다. 그는 회군한 지 11일 만에 우왕과 최영을 사로잡고 쿠데타에 성공했다.

이성계는 특별한 기반이 없는 변방세력이었지만 출중한 전투능력과 사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신흥군벌로 중앙정계에 진입했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아버지와 함께 참전해 공을 세웠다. 1361년 10만 명의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할 당시 개경 탈환 작전에 참여해 선발로 진입했고, 1364년 원나라가 파견한 군대와 전투해 승리를 거뒀다. 그뿐만 아니라 진포해전에서 대패하고 육지로 도망 온 왜구를 황산에서 대파했다. 이렇게 고려에 충성을 바치던 그는 최영 등을 죽인 후 삼군도총제사가 돼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했다. 이어 공양왕을 내세우면서 정권을 장악해갔다.

이성계의 이상과 개혁의지, 백성들에 대한 태도 등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군사력이 필요했던 정도전 등 젊은 신진 사대부 세력들은 이성계와 연합해 권문세족들을 공격했다. 그들의 관직과 특혜를 빼앗았고, 과전법을 만들어 대농장들을 몰수한 뒤 나눠 가졌다. 하지만 이들은 개혁의 방법, 미래 세계에 대한 전망과 헤게모니, 특히 새 나라의 건국 방식과 시기 등을 둘러싸고 정몽주 등 온건파와 정도전 등 급진파로 분열했다. 양측은 갈등을 계속하다가 무력충돌까지 벌어졌다. 1392년 7월 16일 고려는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으로 멸망했고, ‘조선’이라는 신흥국가가 탄생했다. 이른바 무혈로 성공한 역성혁명이었다. 혁명의 평가와 역사의 책임역사 이래 혁명은 항상 있었다. 체제의 완전한 전복, 새로운 세계관과 권력층의 등장 등은 때때로 필수적인 일이다.

고려 멸망이 옳고 그른가의 평가는 최영의 ‘충(忠)’이나 정몽주·길재 등의 ‘의(義)’ 같은 명분과 도덕으로 잣대를 삼을 수는 없다. 개혁과 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이익이라는 보편적인 가치의 실현이지, 자의성이 농후한 집단의 신념, 도덕으로 포장한 명분 등의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후 조선이 취한 정책들의 오류와 유혈 권력투쟁 등의 양상을 보면 결과적으로 잘못된 개혁, 실패한 혁명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첫째는 붕괴를 일으키고 멸망을 재촉한 무능한 왕족과 부패한 기득권인 권문세족들이다. 둘째는 국가 이익에 충실한 최영 등과 정몽주 같은 도덕과 명분을 중요시한 온건 개혁파들이다. 셋째는 군사적 승자인 이성계와 성리학으로 신질서를 추진했던 정도전 등의 교조적인 신진 사대부들이다. 그리고 또 있다. 방관자로서 현실의 고통과 역사 속의 희생을 외면했던 고려의 백성들에게도 책임을 묻고 싶다. 궁금하다. 그들은 농민 반란으로 명나라가 세워진 것을 목도하고, 농민군인 홍건적의 힘과 피해를 체험했으면서도 왜 자신들의 반란, 자신들의 혁명을 시도하지 못했을까. 역사는 말한다. 붕괴에서 멸망까지 걸리는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는 사실을. √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이성계는 특별한 기반이 없는 변방세력이었지만 출중한 전투능력과 사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신흥군벌로 중앙정계에 진입했다. 1361년 10만 명의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할 당시 개경 탈환 작전에 참여해 선발로 진입했고, 1364년 원나라가 파견한 군대와 전투해 승리를 거뒀다. 고려에 충성을 바치던 그는 최영 등을 죽인 후 삼군도총제사가 돼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했다. 이어 공양왕을 내세우면서 정권을 장악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