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이야기
(69) 생물처럼 스스로를 치유하는 물질
공상과학(SF) 영화 '엑스맨'과 '터미네이터'는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은 SF 영화들입니다. 두 영화에서 각각 등장하는 울버린과 T-1000은 지금까지 발표된 수많은 캐릭터 중에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몇 안 되는 인기 캐릭터입니다. 두 캐릭터의 매력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상처를 복원하는 자가치유(self-healing)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가치유 물질로 만든 필름. 자른 후 겹쳐 놓으면 48시간 만에 스스로 붙는다. 원래 길이보다 40배 이상 늘어나며 10㎏ 무게도 견딜 정도로 탄력성이 좋다. /한국화학연구원  제공
자가치유 물질로 만든 필름. 자른 후 겹쳐 놓으면 48시간 만에 스스로 붙는다. 원래 길이보다 40배 이상 늘어나며 10㎏ 무게도 견딜 정도로 탄력성이 좋다. /한국화학연구원 제공
그들은 총이나 칼에 맞아도 즉시 회복돼 불사신에 가깝습니다. 아프지 않고 다치지도 않고 더 나아가 죽지 않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싶은 가장 원초적인 욕구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이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합니다.

아쉽게도 인간이 영화와 같은 극적인 자기-치유 능력을 갖는 것은 현재 과학기술로는 어렵습니다. 자가치유 능력은 영화 속 능력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생물이 무생물과 대비돼 갖는 주요 특징입니다. 자동차 접촉 사고를 내거나 휴대폰을 떨어뜨려 액정이 깨졌을 때 ‘생물처럼 이것들이 스스로 치유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봤을 겁니다. 이 기술은 앞서 언급한 우리의 소망보다 훨씬 우리 가까이에 왔습니다. 실제로 과학자들이 자가치유 물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액체와 고체의 장점을 동시에 지닌 자가치유 물질자가치유 소재 개발 원리는 액체와 고체의 장점을 동시에 지닌 물질을 만드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다’라는 속담은 ‘부부는 싸워도 쉽게 화해한다’는 뜻입니다. 현대사회에 맞지 않는 이 속담을 꺼낸 이유는 “물을 아무리 칼로 베어도 흉터가 남지 않는다”는 물리적 현상을 독자들에게 오래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칼로 베어낸 공간을 물 분자들이 흘러서 메꿔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터미네이터의 T-1000은 액체 상태로 변해 자가치유한 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이유로 국내에서 T-1000을 액체 터미네이터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어떤 소재가 액체 같은 특성만 가진다면 흐르기 때문에 제품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소재를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는 흐르지 않는 고체 같은 특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또 반대급부로 소재의 자가치유 능력을 떨어뜨립니다. 소재의 자가치유 능력과 단단한 특성은 동시에 달성하기 어려운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개발된 자가치유 소재는 젤리처럼 말랑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한국화학연구원(이하 화학연)에서는 이런 모순점을 극복하고 단단하면서도 자가치유 효율이 높은 소재를 개발했습니다. 개발한 자가치유 소재는 터미네이터의 T-1000처럼 자가치유 시에는 액체처럼 말랑해졌다가 다시 외부 충격에 대비해 스스로 단단하게 변하는 물질입니다. 화학연이 사용한 첫 번째 원리는 다이내믹 결합(dynamic bond)입니다.

최근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영감을 받아 자가치유 현상을 설명합시다. 자가치유 소재에 일어나는 분자 운동을 여러분이 운동장에서 하는 놀이로 상상해 봅시다. 일반적인 고분자 소재를 구성하는 공유 결합은 한 번 형성되면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운동장 놀이에서 공유 결합 팀은 사람들이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 술래(늑대)가 나타나면 손을 잡은 채 도망가야 하는데 움직임이 둔해져서 사람들 사이의 대형이 쉽게 무너집니다. 술래가 사라져도 원래 대형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죠. 화학연이 사용한 다이내믹 결합은 붙었다 떨어지는 것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다이내믹 결합 팀은 손을 필요에 따라 놓았다가 다시 잡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 팀은 술래가 나타나면 손을 놓고 다시 잡으면서 대형을 무너뜨리지 않고 손쉽게 도망다닐 수 있습니다. 술래가 사라지면 다시 본래 대형으로 쉽게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화학연이 사용한 두 번째 원리는 ‘외부 충격 응답(stress-responsive)’입니다. 이 소재는 외부에서 오는 충격을 감지해 대비합니다. 강한 충격이 오면 스스로 크리스탈처럼 단단한 물질로 변하고, 외부의 충격이 사라지면 다이내믹 결합을 갖는 분자들이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앞서 사용한 설명을 이어간다면, 외부 충격이 사라진 상태에서 다이내믹 결합 팀은 본래의 대형을 복구하기 위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롤러블 디스플레이 등 첨단제품 소재로 매력적자가치유 물질은 제품의 부품 소재로서 매력적입니다. 자가치유 물질이 의류, 신발, 타이어, 자동차 등에 적용될 경우 제품 수명을 늘릴 수 있어 친환경적입니다. 사람들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거나, 가방에 TV를 담고 다니거나, 비좁은 주차공간에 자동차를 꽉 끼워 넣길 원합니다. 제품 변형 시 발생하는 작은 상처들이 계속해서 치유돼야 이런 제품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자가치유 소재는 앞으로 새로운 첨단 제품을 개발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입니다.

또한, 자가치유 물질은 극한 환경에서 사용되는 제품의 사후 관리를 용이하게 합니다. 지하에 묻은 전선이나 해저 케이블의 경우 피복이 파손되더라도 수리가 매우 어렵죠. 자가치유 물질로 피복을 만들어 전선 및 케이블을 제작할 경우 손상을 스스로 회복하기 때문에 사후 관리가 쉬워집니다. 같은 원리로 주택에 매복된 전선과 케이블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 기억해주세요
오동엽
한국화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오동엽 한국화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자가치유 소재(self-healing material)는 외부의 충격으로 상처가 나면 생물처럼 스스로 회복하는 소재입니다. 자가치유 소재로 제품을 만들면 수명이 오래 가기 때문에 친환경적입니다. 롤러블(rollable), 스트레처블(stretchable) 디스플레이와 같은 첨단 전자제품에 적용할 수 있는 기초 원천 소재입니다. 극한적 환경에서 수리를 자주할 수 없는 제품의 사후 관리를 용이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