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국어 학습
(34) 인물의 내적 독백
[앞부분 줄거리] 차나 한잔 하자는 신문사 문화부장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그는 다른 신문사의 문화부장을 찾아가 차나 한잔 하면서 일자리를 부탁한다. 그러나 문화부장은 돈을 쓰지 않는 사장을 핑계로 부탁을 거절한다. 그는 만화가인 김 선생을 만나 술을 마신다.(34) 인물의 내적 독백
“다방에 가서 그 양반이 그러더군요. 사람 웃기는 방법의 몇 가지 패턴을 안다고 곧 만화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양반이 그랬어요. 두꺼비 같은 눈알을 부라리면서 말입니다.”
찻값을 앞질러 내버리던 그 키가 작달막한 문화부장. 날 무척 무안하게 해줬었지.
“그러면서 말입니다. 너는 미역국이다, 이거죠.”
자기네 사장이 얼른 뒈져달라는 기도를 하라던 그 사람. 난 참 면목이 없어서 혼났지.
“차나 한잔. 그것은 일종의 추파다. 아시겠습니까, 김선생님?” 그는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그 속에서 성실을 다했던 하나의 우연이 끝나고……”
그는 술을 한모금 꿀꺽 마셨다.
“새로운 우연이 다가온다는 징조다. 헤헤, 이건 낙관적이죠, 김선생님?” 그는 김선생이 방금 비워낸 술잔에 취해서 떨리는 손으로 술을 따랐다. “차나 한잔. 그것은 이 회색빛 도시의 따뜻한 비극이다. 아시겠습니까? 김선생님, 해고시키면서 차라도 한잔 나누는 이 인정. 동양적인 특히 한국적인 미담 …… 말입니다.”<중략>
그는 자기의 술잔을 잡으려고 했다. 잘못해서 술잔이 넘어져버렸다. 그는 손가락 끝에 엎질러진 술을 찍어서 술상 위에 ‘아톰X군’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 ‘아톰X군’, 차나 한잔 하실까? 군과도 이별이다. 참 어디서 헤어지게 됐더라.” <중략>
그는 다 그려진 ‘아톰X군’의 얼굴을 다시 손가락 끝에 술을 찍어서, 지우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아톰X군’. 어떻게 군의 힘으로 적진을 뚫고 나오기 부탁한다. 이제 난 …… 힘이 없단 말야. 나와 헤어지더라도 …… 여보게, 우주의 광대하고.” 그러면서 그는 양쪽 팔을 넓게 벌렸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영원한 소년으로 살아 있게.”
- 김승옥,「차나 한잔」-“다방에 가서 … 부라리면서 말입니다.” … 날 무척 무안하게 해줬었지. “그러면서 말입니다. 너는 미역국이다, 이거죠.” … 난 참 면목이 없어서 혼났지. … 그는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소설에서 서술자는 등장인물에 대해 독자들에게 말하는 사람이다. 서술자는 1인칭 시점의 소설에서 작품 속 ‘나’라는 인물로 등장하는 데 반해, 3인칭 시점의 소설에선 작품 밖에 존재한다. 인물에 대해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을 말하는 1인칭 시점의 서술자와 달리, 3인칭 시점의 서술자는 객관적으로 말한다. 그래서 3인칭 시점의 서술자는 인물의 생각이나 사건의 전개를 전하는 방법으로 인물들의 대화나 행동 묘사를 자주 이용한다.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를 주로 드러내고 싶다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하는 것이 가장 좋다. 대화나 행동 묘사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나’가 직접 자신의 심리가 어떠하다고 말하는 방식이 낫기 때문이다. 그런데 3인칭 시점의 소설에서도 인물의 내면 심리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할 때가 있다. 그럴 경우 말이나 행동 묘사 외에 내적 독백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다방에 가서 … 부라리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말입니다. 너는 미역국이다, 이거죠.”는 ‘그’라는 인물의 말이다. 그래서 그 말들은 큰따옴표를 사용해 직접 인용되었다. 그에 비해 ‘날 무척 무안하게 해줬었지’ ‘난 참 면목이 없어서 혼났지’가 큰따옴표 없이 서술된 것에 주목해 보라. 그것들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생각을 내적 독백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다. ‘나’라는 말이 있으니 이 작품을 1인칭 시점의 소설이라고 잘못 아는 학생이 있다.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3인칭 시점의 소설로서, 특정 장면에서만 인물의 말과 내적 독백을 교차하여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그는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라는 서술을 보면 알 것이다. 인물을 ‘나’라고 하지 않고 ‘그’라고 한 것은 3인칭 시점의 서술자가 작중 상황을 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자, ‘아톰X군’, 차나 한잔 하실까? 군과도 이별이다. …” … ‘아톰X군’의 얼굴을 … 지우기 시작했다. … “… 이제 난 …… 힘이 없단 말야. … ” … “어두운 공간 속에서 영원한 소년으로 살아 있게.”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자신의 심리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가 자신을 만화 속 주인공 ‘아톰X군’과 동일시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차나 한잔 하자’는 것은 ‘그’가 ‘문화부장’에게 들었던 말이다. 그것은 일을 그만두라는 뜻에서 한 말인데, 그 말을 ‘그’가 ‘아톰X군’에게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만화를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과의 이별’이라는 말을 듣고 ‘얼굴’이 지워지는 ‘아톰X군’은 더 이상 만화를 그릴 수 없는 ‘그’의 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톰X군’이 처한 ‘어두운 공간’은 ‘그’가 만화를 더 이상 그릴 수 없는 상황을 말한 것이리라. 그런데 ‘그’는 ‘아톰X군’이 ‘영원한 소년으로 살아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자신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소년’은 흔히 문학 작품에서 꿈을 품고 꿈을 이루려 노력하는 존재로 이용된다. 이를 고려하면 ‘그’는 해고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만화가로서 계속 살기를 희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꺼비 같은 눈알을 부라리면서 …” … “… 너는 미역국이다, …” … “차나 한잔. 그것은 일종의 추파다. …” … “차나 한잔. 그것은 이 회색빛 도시의 따뜻한 비극이다. … ”소설도 문학이다 보니 곳곳에 비유적 표현이 많이 눈에 띈다. ‘문화부장’을 묘사하면서 그의 눈을 ‘두꺼비 같은 눈알’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미역국’은 직위에서 떨려날 때나 퇴짜를 맞을 때 사용되는 비유적 표현이다.
따라서 ‘그’가 자신을 ‘미역국’이라고 한 것은 해고당하는 상황을 비유적 표현을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한편 ‘차나 한잔’은 두 가지 의미를 비유하고 있다. 그 하나는 ‘추파’인데, 추파(秋波)는 원래 가을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물결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상대방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은근히 보내는 눈길,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태도나 기색, 미인의 맑고 아름다운 눈길의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이를 이해한다면 그 뒤에 ‘그것은 내가 그 속에서 성실을 다했던 하나의 우연이 끝나고…… 새로운 우연이 다가온다는 징조다.…’ 라는 말이 왜 나온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즉 ‘차나 한잔’은 ‘성실을 다했던 하나의 우연이 끝나’는 해고를 뜻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우연이 다가온다는 징조’ 즉 새로운 일자리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차나 한잔’을 ‘추파’로 비유한 것이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본 것임을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헤헤, 이건 낙관적이죠’라고 ‘그’가 시인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파’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반어적으로 말한 것이다.
또한 ‘차나 한잔’은 ‘회색빛 도시의 따뜻한 비극’을 비유한다. ‘회색빛’은 흔히 암울한 분위기를 드러낼 때 많이 사용되는 색이다. 그것은 ‘비극’이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그런데 ‘회색빛’, ‘비극’은 ‘따뜻함’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만약 그 어휘들이 같이 쓰인다면, 그것은 모순형용, 즉 의미상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말을 함께 사용한 것이다. 결국 ‘그’가 ‘차나 한잔’의 의미를 ‘이 회색빛 도시의 따뜻한 비극’이라고 말하는 것은 해고를 당한 ‘그’의 비참한 심리를 모순형용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 포인트 ① 인물에 대해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을 말하는 1인칭 시점 소설의 서술자와 달리, 3인칭 시점 소설의 서술자는 객관적으로 말한다는 것을 이해하자.
② 3인칭 시점의 소설에서 인물의 말과 내적 독백을 교차하여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방법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음을 알아 두자.
③ 인물이 자신의 심리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특정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아 두자.
④ ‘두꺼비 같은 눈알을 부라리다’, ‘미역국’, ‘회색빛’, ‘소년’이 일반적으로 어떤 의미를 비유하는지를 알아 두자.
⑤ 현실을 반어적 또는 모순형용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이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