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8)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8)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
결국 당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은 성공했고, 신라는 당나라 관복을 차용했으며, 고종이 즉위하자 연호를 폐기한 뒤 당의 연호를 사용했다(문정창, 《한국고대사》). 귀국 도중 고구려 수군에게 붙잡힌 김춘추가 탈출에 실패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평양성 함락 이후 2단계로 접어든 삼국통일전쟁660년 여름(6월), 13만 명의 당나라군은 서해 중부를 횡단해 덕적도에 도착, 태자가 지휘한 신라함대 100척과 합세했다. 나당 연합수군은 황산벌 전투에서 간신히 승리한 김유신의 5만 군대와 합세해 기벌포 해전에서 승리하고, 사비성을 함락한 뒤에 웅진성으로 도피한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해 말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며 신라의 지원을 요구했다. 백제와 금마군(익산 일대)에서 전투하다 죽은 무열왕을 계승한 문무왕은 수레 2000여 대에 쌀과 벼 등을 실어 평양성으로 보냈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습격과 대풍·대설로 인해 군사와 말이 얼어죽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
신라는 663년 백제·왜 연합군을 백강전투에서 물리친 뒤 국력이 강화됐다. 666년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가 귀순하자 문무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고구려를 멸(滅)하는 군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어 문무왕은 친정군을 이끌고 황해도까지 북상해 당군의 평양성 도착을 기다렸으나, 당군이 패퇴하자 회군했다. 668년 당고종은 문무왕에게 대장군의 깃발을 주면서 고구려 공격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고, 신라는 대군을 파견했다.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삼국통일전쟁은 2단계로 접어들었다.
나당 연합군의 주도권은 항상 당나라가 가졌다. 660년 백제를 공격할 때도 무열왕은 군사편제상에서 소정방의 지휘를 받았다. 당고종은 백제의 항복을 받고 귀국한 소정방에게 왜 신라를 치지(伐) 않았느냐고 힐난했다. 663년에는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했으며(《삼국사기》), 전쟁준비를 했다. 신라는 영토의 보존과 자주를 택하는 강경정책을 썼고, 670년 8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됐다. √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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