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4차 산업혁명과 아날로그
한경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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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전환시대의 경영전략을 고민하는 세미나였다. 국내외 유명 인사들이 총출동한 세미나의 무게감을 증명하듯 많은 기업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임원이 많이 참여하는 만큼 중후한 느낌의 만년필 기업도 그중 하나였다. 세미나의 시작은 스폰서 기업들의 홍보 영상으로 시작되었다. 무대 앞에 설치된 대형 3D 사이니지에는 화려한 디지털 기술로 표현된 만년필 광고가 등장했다. 모든 것이 0과 1로 표현되는 새로운 세상을 고민하는 자리의 시작은 전통적인 아날로그 상품인 만년필이었던 것이다. 디지털 세상에 사라지지 않는 아날로그사람들이 ‘서점’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경우는 서점이 문을 닫을 때뿐이었다. 물론 대형 체인서점들은 계속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신규로 문을 여는 경우는 드물다. 우연히 들른 동네에 작은 서점을 발견하면 마치 유적지를 발견한 듯 신기한 느낌이다. LP판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부터 음반협회는 LP판의 판매액을 통계에 포함하지 않았다. 전체 규모에서 숫자의 반올림 오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CD에 대체되기 시작했던 LP판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아이튠즈가 등장하면서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화되면서 달라진 유사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필름도 대표적이다.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필름을 찾아보기 어려워지더니,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필름을 구경해보지도 못한 세대가 많아지고 있다.

최근 이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1995년 아마존의 등장 이후 서점을 비롯한 많은 오프라인 매장은 사라져버렸다. 전자상거래 혁명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동일한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빠른 배송까지 가능해지니 이를 대항할 수 있는 오프라인 매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뉴욕 한복판에 서점이 다시 생기고 있다. LP판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음반산업협회에 따르면 LP 앨범의 판매량은 2007년 90만 장에서 2015년 1200만 장으로 늘었고, 연간 성장률은 20%를 웃돌았다. 필름 역시도 마찬가지다. 인스타그램을 통한 사진 공유가 일반적인 오늘날 필름으로 사진을 찍고, 영화를 찍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디지털의 보완재로서의 아날로그다양한 영역에서 아날로그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디지털 기술 발전이 고도화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디지털이 가져다주는 편리함과 효율성은 아날로그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디지털의 근간은 아날로그다. 아날로그의 단점을 디지털을 통해 보완했지만, 아날로그의 장점까지 디지털이 흉내 내지는 못했다. 아날로그가 주는 경험적 만족을 디지털이 대신할 수 없다.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기록할 때 키보드가 펜을 대신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디지털 펜슬이 등장했고, 기능적으로는 펜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동일한 감성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서점이 다시 등장하고, LP 앨범과 필름이 다시 사용되는 이유도 동일하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최저가를 제안하고, 취향에 맞는 책을 자동으로 추천해주기도 하지만 책을 구입하기 전에 누군가와 진지하게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근 오프라인 서점들에서는 필요한 책을 전문인력과 상담하여 구입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책을 만나기도 하고, 타인과 생각의 교환을 통해 교감한다. 킨들에서 수많은 도서 평가 페이지를 넘겨보며 책을 선택할 때는 느낄 수 없는 감성이다. LP 앨범도 마찬가지다. 아날로그 녹음방식으로 기록되는 LP 앨범은 동일한 부분을 반복하여 녹음한 뒤 좋은 것만 골라낼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녹음을 완료해야만 한다. 음질은 디지털에 비해 떨어질지 모르지만, 0과 1로 표현해낼 수 없는 감성을 담아낼 수 있다. 디지털 음반이었다면 데이비드 보위의 <파이브 이어스> 마지막에 떨리는 목소리를 담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필름 역시 마찬가지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한 덕분에 그래픽과 디지털 필름으로 구현한 영상의 격차가 작아지고 있다. 감독들은 다시 아날로그 필름으로 돌아가고 있다. ‘컴퓨터 특유의 완벽함’이 감동을 반감시킨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업과 아날로그 기업디지털 시대는 기업의 운영 형태도 변화시켰다. ‘테크기업’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업은 공장도, 많은 노동자도, 큼직한 사무실도 필요하지 않다. 아이디어 하나로 수십억달러에 인수되기도 한다. 신속한 확장이 가능한 덕분에 디지털 비즈니스는 그 가치를 10배, 20배, 100배로 확장할 수 있다. 이는 아날로그 비즈니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도 고용해야 하고, 창고도 지어야 하며, 물리적인 공급망도 확보해야 하는 탓에 두 자릿수 성장률은 매우 좋은 성적이다. 디지털 비즈니스의 위험성이 훨씬 크다는 것도 다른 점이다. 승자독식 산업인 디지털 비즈니스에 투자하는 벤처투자자들은 10개 기업에 투자할 경우 1개 기업의 성공으로 9개 실패를 보전할 수 있다. 반면 아날로그 기업에 투자해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문제는 두 방식의 기업은 기초자산이 다르다는 점이다. 디지털 기업이 파산할 경우 남겨지는 것이 거의 없지만, 주택단지를 개발했던 아날로그 기업은 최소한 땅이라도 남는다. 이는 지역사회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차이다.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분명 아날로그도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 전환시대에 다양한 분야에서 그 매력은 점점 더 돋보이고 있다. ☞ 포인트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디지털시대에도 다양한 분야서
아날로그의 매력은 다시 등장
디지털의 근간은 아날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