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을 들여다보면 '고유어 같은 한자어'가
꽤 많다. '기어이, 기어코, 도대체, 어차피, 심지어,
무려, 하필, 점점, 우선' 같은 부사가 그런 예다.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진한 안개'와 '짙은 안개'
정부 조직에는 국립국어원 외에 우리말을 전문으로 다루는 곳이 또 한 군데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기술표준원이 그곳이다. 여기서는 산업계에서 쓰이는 각종 용어를 다룬다. 이른바 ‘산업계의 표준어’인 산업표준(KS)을 정하는 곳이다. 지난해 이곳에서 그동안 써오던 색이름 몇 가지를 바꿨다.

‘진하다’는 한자어…고유어로는 ‘짙다’

이때 ‘진갈색’ ‘진보라’가 ‘밝은갈색’ ‘밝은보라’로 제시됐다. 색이름이 실제 색깔과 달라 문구류와 디자인업계, 교육계에 혼란을 초래했기 때문이었다. 가령 ‘진갈색’이라고 하면 갈색보다 짙은 색을 떠올리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런데 색칠을 해보면 오히려 ‘밝은 갈색’을 띠었다. 그래서 이를 실제 색깔에 맞게 밝은갈색, 밝은보라로 바로잡았다.

고유어 같기도 하고 한자어 같기도 한 이 ‘진-’은 무엇일까? “국물이 참 진하네.” “안개가 진하게 끼었다.” 이런 말을 일상에서 흔히 쓴다. “진갈색, 진노랑, 진빨강” 같은 단어도 자주 듣는다. 이때 ‘진’은 얼핏 보면 토박이말 같다. 하지만 한자어다. ‘津’이 그 정체다. 이 한자는 통상 ‘나루 진’(서울시 노량진, 충남 당진 등에 쓰인 ‘진’이다)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서는 ‘진액 진’, 즉 엑기스란 뜻이다. 진물, 송진 같은 데 쓰인 ‘진’이 모두 이 의미다.

이런 데 쓰인 ‘진’은 의미상 순우리말로 ‘짙다’에 가깝다. 그러니 진갈색, 진보라는 곧 짙은 갈색, 짙은 보라다. 이를 그동안 밝은 갈색, 밝은 보라에 잘못 붙여 써온 것이다. 국물이나 안개가 ‘진하다’라고 해도 되지만, 이를 ‘짙다’라고 써보자. 그러면 말맛이 더 깊게 우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선하다’와 ‘우선시하다’ 구별해 써야

우리말의 속을 들여다보면 이런 ‘고유어 같은 한자어’가 꽤 많다. 한자가 우리말에 들어와 토착화한 방식에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부사어는 한자의식이 흐려져 구별하기가 더 쉽지 않다. ‘기어이, 기어코, 도대체, 어차피, 심지어, 무려, 하필, 점점, 우선’ 같은 부사가 그런 예다. 이 가운데 ‘우선’은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떤 일에 앞서서. 아쉬운 대로’란 뜻으로 쓰이는 이 말은 한자로 ‘于先’이다. 작고한 원로 언론인이자 한글학자이신 정재도 선생은 생전에 이 말을 순우리말이라고 주장했다. 사전에서 한자 ‘于先’을 말밑으로 해놓았지만, 이는 마치 우리말, ‘우리’를 ‘于理’ 식으로 취음해 억지로 한자말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이런 논란은 국어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우리가 글쓰기에서 조심해야 할 점은 이 ‘우선’과 또 다른 한자어 ‘우선(優先)’을 구별하는 일이다. 앞의 ‘우선’이 부사(예: 우선 이만하면 떠날 준비는 다 됐다.)인데 비해 ‘우선(優先)’은 명사다. ‘딴 것에 앞서 특별하게 대우함’을 나타낸다. “이 집은 매사가 아들 우선이다”느니,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느니 할 때 이 ‘우선’이 쓰였다. 여기에 접미사 ‘-하다’를 붙여 동사를 만드는데, 이때 통사적 용법에 주의해야 한다. ‘우선하다’는 자동사라 ‘A가 ~에 우선하다’ 꼴로 쓴다. “학벌보다 능력이 우선하는 사회”가 그 예다. 타동사를 써야 할 문맥이라면 ‘우선시하다’를 써야 한다.(“그는 학벌보다 능력을 우선시한다.”)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실제 글쓰기에선 이런 차이를 놓치기 십상이다. 다음 문장을 통해 실전연습을 해보자. ‘한국 외교에서 국익을 최우선하는 자세가 절실하다.’ 타동사를 필요로 하는 문맥이므로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하든지 ‘국익을 최우선시하는’이라고 해야 바른 문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