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서 '실시'를 남발하는 것은 오랜 병폐 중 하나다.
정부 보도자료, 특히 정책 자료를 보면 십중팔구 '실시'가 들어있다.
이는 지난 세월 관급(官給)의 시혜적 말투가 지금까지 굳어져 온 탓이 크다.
‘세벌대기단, 굴도리집, 불발기, 오량가구….’ 이들은 겉모양만 우리말일 뿐, 일반인은 아무도 모르는 암호 같은 말일 뿐이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국무회의 도중 거론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난해한 공공언어의 문제점을 지적한 대목이었다.정부 보도자료, 특히 정책 자료를 보면 십중팔구 '실시'가 들어있다.
이는 지난 세월 관급(官給)의 시혜적 말투가 지금까지 굳어져 온 탓이 크다.
공급자 중심의 말 여전히 많아
극소수만 아는 전문용어가 공공언어로 포장돼 쓰이고 있는 현실은 우리말이 여전히 공급자 중심의 언어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주위에서 마주치는 ‘정체불명의 우리말’은 수없이 많다. 몇 개만 살펴봐도 그 실태가 어떤지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육생비오톱, 차집관거, 볼라드….’ ‘육생(陸生)’은 뭍에서 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오톱’은 그리스어로 생명을 의미하는 비오스(bios)와 땅을 의미하는 토포스(topos)가 결합해 만들어졌다. 다양한 생물종의 서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조성한 곳을 뜻한다. ‘생물서식지’라고 하면 좀 알아보기 쉽다. 하지만 이보다 ‘자연과 함께하는 공간’ 또는 ‘동식물이 살고 있어요’ 식으로 나타내는 게 더 친근감 있는 표현법이다.(성제훈 농업진흥청 농업연구관, 한글학회 간 <한글 새소식> 533호)
‘차집관거’는 하수나 빗물을 모아 처리장으로 보내기 위해 만든 관(管)이나 통로다. ‘차집(遮集)’이 ‘막고 모으는 것’이고, ‘관거(管渠)’는 ‘관으로 된 물길’을 뜻한다. 평생 한 번 쓰지도 않을 용어로 말을 만든 셈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1996년 ‘관거(管渠)’를 관도랑이나 관수로로 쓰도록 다듬었다. 용도에 따라 ‘빗물관길’ ‘하수관길’ 식으로 쓰면 된다.
길을 가다 보면 인도나 잔디밭 등에 차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뚝을 박아놓은 장애물이 눈에 띈다. 그걸 볼라드(bollard)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래선 낯설고 잘 안 들어온다. ‘길말뚝’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14년 국립국어원에서 다듬었다.
무거운 한자어 버리는 데서 시작해야
‘언어의 민주화’는 우리말을 수용자 관점에서 사용하는 데서 시작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된다. ‘흡연자 단속을 실시합니다.’ 금연 인식이 커지면서 공공장소에 나붙은 안내문이다. 우리말이긴 한데 뭔가 어색하다. ‘흡연자(를) 단속합니다.’ 이게 우리말다운 표현이다.
글쓰기에서 ‘실시’를 남발하는 것은 오랜 병폐 중 하나다. 정부 보도자료, 특히 정책 자료를 보면 십중팔구 ‘실시’가 들어있다. 이는 지난 세월 관급(官給)의 시혜적 말투가 지금까지 굳어져 온 탓이 크다. ‘일제 조사를 실시할 방침이다’ 같은 데서 그런 성향이 잘 드러난다. 행위 주체가 정부이므로 당연히 공급자 시각을 담았다. 대부분 ‘실시’를 붙이지 않아도 충분하다. ‘일제히 조사할 방침이다’ 식으로 하는 게 자연스러운 우리 어법이다.
이런 영향 탓인지 몰라도 민간 업체에서도 “가을 나들이족을 위해 다양한 프로모션을 실시합니다” 같은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 ‘판촉행사를 벌입니다’라고 하면 어색하지 않고 편하다. 신문의 기사문장에서도 자주 눈에 띈다. 가령 ‘조기 총선을 실시했다’보다 ‘조기 총선을 치렀다’가 우리 몸에 익은 표현이다.
글쓰기에서 이런 것들은 수없이 많다. ‘~에 위치한’이라 하지 말고 ‘~에 있는’이라고 써보자. ‘~을 수거했다’보다 ‘~을 거뒀다’가 편하고, ‘분실했다’보다 ‘잃어버렸다’가 눈에 잘 들어온다. 무엇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 ‘꾀하는’ 것이고, 어떤 현상이 ‘심화되는’이 아니라 ‘깊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글이 더 감칠맛 나고 말맛도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