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 우리 글자, 우리말, 국어의 수난사는 곧 우리 민족의 질곡의 역사였다.
그중에서도 1942년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은 우리말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갔다.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한글학회 110돌… 되돌아 보는 우리말 수난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회는 어디일까? 1908년 8월31일 서울 돈의문 밖 봉원사에 하기 국어강습소 졸업생들을 비롯해 우리말 연구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심에는 우리가 잘 아는 주시경 선생이 있었다. 이들은 기울어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겨레 말글을 지키고 살려야 할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 자리에서 ‘국어연구학회’가 탄생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한글학회가 지난 8월31일 창립 110돌을 맞았다. 국어연구학회는 이후 1911년 배달말글?음, 1912년 한글모, 1921년 조선어연구회, 1931년 조선어학회란 이름을 거쳐 1949년 지금의 한글학회로 명칭을 바꿨다. 이때의 개명은 남쪽의 한국과 북한이 ‘대한’과 ‘조선’으로 말을 달리 사용하는 분단 현실도 한 원인이었다(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한글 새소식’ 552호).

한글과 우리 글자, 우리말, 국어의 수난사는 곧 우리 민족의 질곡의 역사였다. 그중에서도 1942년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은 우리말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갔다.

그 발단은 다소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그해 여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한 청년이 조선총독부의 지령인 단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혔다. 불순분자 혐의로 청년의 집을 수색하던 일제 경찰은 그의 조카가 2년 전에 쓴 일기장에서 “오늘 국어를 사용하다가 벌을 받았다”란 글귀를 찾아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는 일본어가 곧 ‘국어’였다. 일경으로서는 ‘국어인 일본어를 썼다’고 해서 벌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자 담임교사를 내사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실제론 일본어가 아니라 조선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벌을 받은 것이었다. 조카에겐 우리말이 국어이므로 당연히 그리 쓴 것이다. 그러자 일제는 ‘조선어를 국어라 가르쳤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핍박했다. 대상자로 지목된 교사는 1년 전 경성으로 옮겨 조선어학회 일을 보고 있었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대대적으로 수색해 관계자 검거에 나섰다. 이때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장지영, 안재홍, 이은상 선생 등 당대의 우국지사들이 대거 투옥됐다.

한글에 대한 잘못된 상식도 많아

이 일로 당시 16만여 어휘를 모아 완성 단계에 이르렀던 <조선말 큰사전> 편찬 작업이 중단된 것도 큰 시련이었다. 그 와중에 사전 원고마저 잃어 거의 포기 직전까지 갔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역 화물창고에서 원고 뭉치를 찾아 1947년 제1권에 이어 1957년까지 순차적으로 제6권을 펴냈다. <큰사전>이 나오기까지 그 ‘작업’은 우리 손으로 했으나 정작 사전이 빛을 보도록 ‘돈’을 댄 곳은 따로 있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 록펠러재단에서 해방 뒤 한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사전편찬 작업을 지원한 데 힘입은 것이다.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한글학회 110돌… 되돌아 보는 우리말 수난의 역사
한글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과학적 문자다. 하지만 잘못 알려진 상식도 꽤 많다. ‘한글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얘기도 그중 하나다.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한글이 아니라 그것을 기록한 책이다. 즉 한글이라는 고유 문자를 지정한 게 아니라 그것의 원리와 창제 취지를 기록한 책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정한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 28년(1446)에 훈민정음 28자를 세상에 반포할 때에 찍어낸 것으로, 일종의 해설서다. 국보 제70호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훈민정음을 설명한 책이지만 한문으로 돼 있다는 점도 함께 알아둘 만하다.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