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무부 '무역확장법 232조' 수입 규제안 발표
日·獨·캐나다 등 주요 동맹국은 빠지고
53% 관세 12개국에 한국만 유일하게 포함
"정부 통상외교 제대로 작동 안된다" 지적 나와
미국이 자국 철강·알루미늄 산업 보호를 위해 ‘안보’를 명분으로 ‘관세폭탄(또는 수입량 할당)’이라는 보호무역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동안 의회뿐 아니라 국방부 등 행정부 내부에서도 관련 제품의 가격 상승과 무역 보복조치 등을 이유로 끈질기게 반대했던 조치다. 앞으로 반도체 및 자동차 등 다른 분야에도 똑같은 카드를 꺼내 쓸 수 있다는 의지를 보인 ‘예고편’으로 해석된다.
일본은 빼고 한국은 규제日·獨·캐나다 등 주요 동맹국은 빠지고
53% 관세 12개국에 한국만 유일하게 포함
"정부 통상외교 제대로 작동 안된다" 지적 나와
지난 16일 미 상무부가 공개한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철강 수입이 미 안보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는 53%의 관세폭탄 부과 대상으로 브라질 러시아 터키 인도 중국 등과 함께 한국을 12개 규제 대상국에 포함시켰다. 윌버 로스 미 상무장관은 보고서 공개 직후 미 무역전문지 ‘인사이드US트레이드’와의 인터뷰에서 “공식에 따라 규제 대상을 선정한 것은 아니다”면서도 “최근 몇 년간 생산능력 증가율과 수입품의 성격, 환적 여부 등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대미 수출 증가율”이라고 말했다.
관련 업계는 이런 발언이 1962년 제정 후 사실상 사장돼 있던 무역확장법 232조를 꺼낼 때의 궁색한 논리처럼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한국은 2017년 기준으로 캐나다 브라질에 이어 대미 3위 철강 수출국이다. 1위인 캐나다는 규제 대상에서 빠졌다. 한국의 대미 수출 증가율도 2011년부터 2017년까지 42%에 불과해 규제 대상에 들어가지 않은 대만(116%), 스페인(106%), 아랍에미리트(358%)보다 낮았다.
환적수출(transship)도 근거가 부족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로스 장관은 이달 13일 여야 의원들과의 통상문제 간담회에서 중국 철강제품을 수입해 미국에 가공 수출하는 국가를 ‘악당(evildoer)’이라고 부르며 이를 무역확장법 232조를 발동해 잡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한국이 중국 제품을 가공해 미국에 수출하는 물량은 전체 대미 수출량의 2%에 불과하다.
펜스 부통령 방한 이후 ‘압박’ 주목
워싱턴 외교가는 미국이 대미 수출 증가율도 크지 않고, 중국산 환적수출도 많지 않은 ‘동맹국’ 한국을 굳이 규제 대상에 포함시킨 이유에 주목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7일 “(미 상무부 조치는) 누가 불공정한 무역을 행한 주범이며 누구에게 제재를 가해야 할지 알기 쉽게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철강·알루미늄 수입량을 제한하는 효과는 크지 않지만 유권자에게 누가 무역분쟁 대상인지 알려주고, 향후 개별 국가와의 통상교섭에서 쓸 카드를 미리 마련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국이 선택한 정치·외교적 상황이 이 같은 결과를 불러왔다는 해석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워싱턴의 한 통상 전문가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한국 방문 후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 관련 발언이 공세적으로 변한 부분을 눈여겨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펜스 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돌아온 직후인 12일부터 “한국은 6·25전쟁 때 도움을 받아 부자가 됐다. 이제 미국에 되갚아야 할 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이 제대로 안 되면 폐기하겠다” 등 한국을 겨냥한 ‘작심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백악관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은 “펜스 부통령의 방한 보고를 받고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얘기가 들린다”며 “미국은 북한만큼 한국에 대해서도 한·미·일 공조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통상을 통해 ‘최대의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달 미국이 삼성·LG전자 세탁기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결정을 내린 것에 이어 철강 제품에도 고강도 무역제재를 예고하자 일각에서는 “정부의 통상외교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결단에 달린 통상규제
트럼프 대통령이 상무부의 권고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관심이다. 상무부는 고율 관세 등 수입규제 방안을 제안하면서 “미국의 경제적, 안보적 이해에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대통령이 개별 국가에 예외를 둘 수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 하는 것을 봐서 규제 대상에서 뺄 수도, 계속 넣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부시 행정부의 이코노미스트 출신이자 시카고 카운슬 국제문제협의회(CCGA) 무역 전문가인 필 레비는 CNN 인터뷰에서 무역확장법 232조 발동에 대해 “국가안보라는 명목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문을 연 것”이라며 “글로벌 무역전쟁의 포문을 연 셈”이라고 말했다.
워싱턴=박수진/도쿄=김동욱 특파원/이태훈 기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