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적인 장례 절차에 '호상'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호상은 '초상 치르는 데에 관한 온갖 일을 책임지고 맡아 보살피는 사람'을 말한다.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이는 누구였을까? 정대일이란 사람이 있었다. 조금 과장하면 조선팔도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실존 인물은 아니다. 가공의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누구나 아는 유명인이 될 수 있었을까? 후대로 오면서 부풀려졌겠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그 이름이 부고(訃告)에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護喪(호상) 丁大一(정대일)’로 쓰였다.
상주 대신해 장례 절차 진행
신문들은 지난 주초 ‘제약 1세대’로 알려진 정형식 일양약품 창업주의 별세 소식을 크게 전했다. 이와 함께 일양약품의 부고 광고를 게재했다. 이 부고는 요즘 보기 드물게 토씨 정도만 빼고 죄다 한자로 작성됐다는 점이 특이했다. 한자 의식이 점차 흐려져 가는 때라 이를 제대로 읽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 같다. 그중 하나로 쓰인 ‘護喪’도 눈에 띄었다. 이 말을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우리 전통적인 장례 절차에 ‘호상’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호상은 ‘초상 치르는 데에 관한 온갖 일을 책임지고 맡아 보살피는 사람’을 말한다. 요즘은 시절이 달라져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이 직접 주변에 부고를 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런 건 예전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부모가 돌아가면 자식은 졸지에 ‘죄인’이 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곡(哭)을 하고 문상객을 받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양반가에서 상을 치를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역할이 호상이었다. 이 사람이 상주를 대신해 부고를 띄우고 빈소도 마련하는 등 장례 절차 전반을 관장하고 지휘했다. 호상은 대개 집안의 원로급 큰어른이나 지인들 가운데 명망 있는 사람이 대표로 나서서 맡았다. 이때 호상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거나 적절하지 않을 때 내세우던 이름이 ‘정대일’이었다. 丁(정)은 우리나라의 성씨 중 가장 획수가 적은 성이다. 大(대)자와 一(일)자 역시 획수가 적어 간단히 쓸 수 있는 글자라 가공의 이름으로 지어졌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람이 살아가면서 상례(喪禮)는 수시로 겪는 일이니 ‘정대일’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부고보다 ‘궂김알림’ 써볼 만해
정대일의 유래에 관해 한문학자인 김영봉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지금 같은 통신수단이 없던 옛날엔 사람을 시켜 부고를 전했다. 그러니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양의 부고를 써야 했다. 김 위원은 “일일이 부고를 써서 전달하던 시절이라 호상이 정해지기 전이라도 우선 통지하는 게 더 급했다”며 “그럴 때 제일 간편한 ‘丁大一’을 임시이름으로 썼다”고 했다. ‘호상 정대일’이 기록된 문헌 자료는 찾기 쉽지 않다. 옛날엔 부고를 받으면 보관하지 않고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정대일은 실명을 밝히기 어려운 경우에도 쓰였다. 1947년 간행된 음담패설 설화집 ‘조선상말전집’의 편저자로 정대일(실제 편저자는 육당 최남선으로 보인다고 한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이 나온다. 조선시대에 통용된 가명이었던 셈이다.
참고로 부고와 부음이 혼용되기도 하는데, 표준 용어는 부고란 것도 알아둘 만하다. 국가기술표준원은 2003년 1월 장례식장에 대한 수요 증가 추세에 맞춰 장례용어 58개를 표준화해 발표했다. 이때 부음은 버리고 부고로 통일했다. 부고는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니 순우리말로 ‘궂김알림’이라고 할 만하다. ‘궂기다’는 ‘윗사람이 죽다’란 뜻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자주 쓰면 익숙해지고, 그래야 우리말이 오른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이는 누구였을까? 정대일이란 사람이 있었다. 조금 과장하면 조선팔도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실존 인물은 아니다. 가공의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누구나 아는 유명인이 될 수 있었을까? 후대로 오면서 부풀려졌겠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그 이름이 부고(訃告)에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護喪(호상) 丁大一(정대일)’로 쓰였다.
상주 대신해 장례 절차 진행
신문들은 지난 주초 ‘제약 1세대’로 알려진 정형식 일양약품 창업주의 별세 소식을 크게 전했다. 이와 함께 일양약품의 부고 광고를 게재했다. 이 부고는 요즘 보기 드물게 토씨 정도만 빼고 죄다 한자로 작성됐다는 점이 특이했다. 한자 의식이 점차 흐려져 가는 때라 이를 제대로 읽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 같다. 그중 하나로 쓰인 ‘護喪’도 눈에 띄었다. 이 말을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우리 전통적인 장례 절차에 ‘호상’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호상은 ‘초상 치르는 데에 관한 온갖 일을 책임지고 맡아 보살피는 사람’을 말한다. 요즘은 시절이 달라져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이 직접 주변에 부고를 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런 건 예전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부모가 돌아가면 자식은 졸지에 ‘죄인’이 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곡(哭)을 하고 문상객을 받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양반가에서 상을 치를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역할이 호상이었다. 이 사람이 상주를 대신해 부고를 띄우고 빈소도 마련하는 등 장례 절차 전반을 관장하고 지휘했다. 호상은 대개 집안의 원로급 큰어른이나 지인들 가운데 명망 있는 사람이 대표로 나서서 맡았다. 이때 호상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거나 적절하지 않을 때 내세우던 이름이 ‘정대일’이었다. 丁(정)은 우리나라의 성씨 중 가장 획수가 적은 성이다. 大(대)자와 一(일)자 역시 획수가 적어 간단히 쓸 수 있는 글자라 가공의 이름으로 지어졌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람이 살아가면서 상례(喪禮)는 수시로 겪는 일이니 ‘정대일’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부고보다 ‘궂김알림’ 써볼 만해
정대일의 유래에 관해 한문학자인 김영봉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지금 같은 통신수단이 없던 옛날엔 사람을 시켜 부고를 전했다. 그러니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양의 부고를 써야 했다. 김 위원은 “일일이 부고를 써서 전달하던 시절이라 호상이 정해지기 전이라도 우선 통지하는 게 더 급했다”며 “그럴 때 제일 간편한 ‘丁大一’을 임시이름으로 썼다”고 했다. ‘호상 정대일’이 기록된 문헌 자료는 찾기 쉽지 않다. 옛날엔 부고를 받으면 보관하지 않고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정대일은 실명을 밝히기 어려운 경우에도 쓰였다. 1947년 간행된 음담패설 설화집 ‘조선상말전집’의 편저자로 정대일(실제 편저자는 육당 최남선으로 보인다고 한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이 나온다. 조선시대에 통용된 가명이었던 셈이다.
참고로 부고와 부음이 혼용되기도 하는데, 표준 용어는 부고란 것도 알아둘 만하다. 국가기술표준원은 2003년 1월 장례식장에 대한 수요 증가 추세에 맞춰 장례용어 58개를 표준화해 발표했다. 이때 부음은 버리고 부고로 통일했다. 부고는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니 순우리말로 ‘궂김알림’이라고 할 만하다. ‘궂기다’는 ‘윗사람이 죽다’란 뜻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자주 쓰면 익숙해지고, 그래야 우리말이 오른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