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안전용어, 우리말 놔두고 꼭 영어로 써야 할까요?
국민 안전을 책임진 소방서에서 구호를 '119의 약속 Safe Korea'라고 정한 것에도 비판이 쏟아졌다. 외국말을 구호로 쓰는 정부 부처의 '무개념'은 둘째 치고 이 정도는 누구나 안다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시민들은 오히려 '안전을 위협하는 안전용어'라고 지적했다.

굿닥 2960표, BRT 2720표, Kiss & Ride 2570표…. 우리 국민이 반드시 바꿔 써야 할 말로 꼽은 ‘안전용어’들이다. 우리말 운동 시민단체인 한글문화연대(대표 이건범)는 지난 10월7~9일 사흘간 서울 세종로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투표를 벌였다. 우리가 쓰는 안전용어 가운데 16개를 제시한 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골라 투표하게 했다. 공공언어에서 어려운 말을 버리고 외국어 남용을 줄이자는 활동에 앞장서 온 한글문화연대가 벌이는 ‘안전용어 다듬기’ 작업의 일환이었다.

안전 위협하는 안전용어들

투표 결과 시민들이 생각하는 것은 서로 비슷했다. 새로 나오는 것, 또는 기존에 쓰던 말 가운데서도 어렵고 국적불명인 용어를 압도적으로 많이 선택했다. 자동제세동기(심장충격기), EMERGENCY(비상전화), 단차(높낮이), Safe Korea(안전한 대한민국), 싱크홀(땅꺼짐), 스크린도어(안전문) 등이 뒤를 이었다.

바꾸고 싶은 말 1위에 오른 ‘굿닥’은 연고, 생리대, 휴지, 반창고 등 간단한 비상약을 무료로 갖추고 있는 곳을 뜻한다. 같은 이름의 ‘병원·약국 검색 앱’을 개발한 한 업체에서 서울교통공사와 함께 지하철 등 다중이 이용하는 장소에 설치했다. 그 덕에 최근 이름이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동시에 대중의 호된 비판을 받는 대상이 됐다. ‘비상약 보관함’ 정도로 쓰면 누구나 알 수 있지 않을까?

시민들은 세종시에서 도입해 운영하고 있는 BRT도 시급히 바꿔야 할 말로 지적했다. ‘bus rapid transit’의 머리글자를 딴 이 용어는 도심과 외곽을 잇는 주요 도로에 급행버스가 운행되는 교통시스템을 말한다. 간선급행버스체계 또는 빠른버스체계 식으로 했으면 거부감도 없고 국민 소통에도 기여하지 않았을까?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까닭은 중국말과 우리말이 다른 데서 오는 불편함 때문이었다. 일반 백성이 자기 뜻을 글로 나타낼 수 없으니 쉬운 글자를 만들어 쓰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 세종시에서 뜻 모를 BRT를 내세웠으니 세종대왕이 살아있다면 통탄할 일인 셈이다.

공공언어부터 바로잡아야

Kiss & Ride도 감 잡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라 3위에 올랐다. 알쏭달쏭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는 이 용어는 우리와는 다른, 외국 문화의 산물이다. 기차역에서 누군가를 마중(또는 배웅)할 때 잠깐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그런데 ‘키스’는 왜 들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신분당선 동천역 등 국내에도 이미 몇 군데 있다고 한다. ‘마중주차’ 정도면 좋을 듯하다.

국민 안전을 책임진 소방서에서 구호를 ‘119의 약속 Safe Korea’라고 정한 것에도 비판이 쏟아졌다. 외국말을 구호로 쓰는 정부 부처의 ‘무개념’은 둘째 치고 이 정도는 누구나 안다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시민들은 오히려 ‘안전을 위협하는 안전용어’라고 지적했다.

홍성호 한국경제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홍성호 한국경제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정부기관에서 앞장서 우리말을 홀대하고 외국말을 내세우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공공언어 정책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몇 년 전부터 시행하는 ‘굿스테이’ 제도는 명칭이 ‘Good Stay’다. ‘우수 숙박시설’이라 하면 괜찮았을 말이다. 2015년엔 국토교통부가 ‘뉴스테이(New Stay)’ 정책을 내놨다.

중산층 주거안정을 위한 제도인데, ‘기업형 임대주택’이라고 하면 충분한 말이다. 공공기관에서 여전히 ‘영어를 써야 먹힌다’는 인식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말을 널리 알리고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