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글날은 최초의 우리말 대사전 격인 ‘조선말 큰사전’ 완간 60돌이기도 했다. 1947년 제1권을 펴낸 뒤 순차적으로 1957년 10월9일 마지막 제6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9일은 571돌을 맞은 한글날이었다. 세종대왕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 음력 9월 상한에 이를 반포했는데,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 지금의 한글날이다.
10월은 우리말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일이 많은 달이다. 우선 올해 한글날은 최초의 우리말 대사전 격인 ‘조선말 큰사전’ 완간 60돌이기도 했다. 1947년 제1권을 펴낸 뒤 순차적으로 1957년 10월9일 마지막 제6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큰사전의 출발이 일제 강점기이던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구성하면서 비롯됐으니 28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서울역 창고에서 되찾은 사전 원고
우리말 지식의 보고인 큰사전 편찬 과정은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도 궤를 같이한다.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통일된 맞춤법이 필요했다. 그에 따라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마춤법 통일안’을 발표한 게 1933년 10월이다. 이어 1936년 10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펴냈다. 일제의 감시와 간섭 속에 어렵사리 꾸려오던 편찬작업은 1942년 10월 들어서부터 노골적인 탄압을 받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진 것이다. 학자·후원자 등 30여 명이 체포, 구금되고 사전 원고는 압수됐다. 당시 원고는 16만여 어휘를 풀이까지 마쳐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었다. 일제는 이 원고에서 ‘조선’ ‘임진왜란’ ‘무궁화’ 같은 우리 민족성을 드러내는 말의 설명을 놓고 꼬투리를 잡았다. 또 ‘경성’은 풀이가 긴데 ‘동경’은 왜 짧으냐 등을 따지며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핍박했다.(‘우리시대의 언어게임’, 고길섶)
광복을 맞아 편찬작업 재개에 나선 조선어학회는 또 다른 시련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그동안 모아뒀던 사전 원고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 증거물로 압수돼 이리저리 이송되는 과정에서 분실한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1945년 9월 서울역 화물창고 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원고뭉치를 찾았다. 이를 토대로 하고 일부 자료를 보완해 1947년 한글날을 맞아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이어 해를 거듭하며 제2권(이때부터 ‘큰사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제3권이 순차적으로 나왔으나 6·25가 터지면서 큰사전 편찬은 또다시 기약없는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가난하던 시절…미국 도움으로 완간
조선어학회에서 이름을 바꾼 한글학회는 휴전협정 뒤 사전편찬 재개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정부의 ‘한글 간소화안’이 발목을 잡았다. 이것은 그동안 써오던 맞춤법을 버리고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는 게 핵심이었다. 가령 ‘꽃나무’를 ‘꼰나무’로 적는 식이었다. 한글학회로서는 이미 출간한 1~3권을 비롯해 나머지 원고를 모두 바꿔야 할 판이었으니 기가 막히는 상황이었다. 훗날 ‘한글파동’으로 명명된 이 사태는 거센 국민적 논란과 저항 끝에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포기 담화 발표로 가라앉았다. 이후 한글학회는 사전 편찬 마무리에 박차를 가해 1957년 제4, 5권을 잇달아 낸 뒤 그해 한글날에 제6권을 펴냄으로써 비로소 큰사전 완간을 보았다.
‘겨레의 얼을 세우고 민족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큰사전이 경비가 없어 미국 도움으로 빛을 봤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미 록펠러재단은 8·15 광복 뒤 한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한글학회의 사업을 선택해 지원했다.
당시 한글학회 이사장이던 최현배 선생은 완간본 발간사에서 록펠러재단이 최대 원조자였다고 밝혔다. 큰사전은 이후 1991년 내용을 깁고 더한 뒤 ‘우리말 큰사전’으로 재탄생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지난 9일은 571돌을 맞은 한글날이었다. 세종대왕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 음력 9월 상한에 이를 반포했는데,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 지금의 한글날이다.
10월은 우리말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일이 많은 달이다. 우선 올해 한글날은 최초의 우리말 대사전 격인 ‘조선말 큰사전’ 완간 60돌이기도 했다. 1947년 제1권을 펴낸 뒤 순차적으로 1957년 10월9일 마지막 제6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큰사전의 출발이 일제 강점기이던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구성하면서 비롯됐으니 28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서울역 창고에서 되찾은 사전 원고
우리말 지식의 보고인 큰사전 편찬 과정은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도 궤를 같이한다.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통일된 맞춤법이 필요했다. 그에 따라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마춤법 통일안’을 발표한 게 1933년 10월이다. 이어 1936년 10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펴냈다. 일제의 감시와 간섭 속에 어렵사리 꾸려오던 편찬작업은 1942년 10월 들어서부터 노골적인 탄압을 받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진 것이다. 학자·후원자 등 30여 명이 체포, 구금되고 사전 원고는 압수됐다. 당시 원고는 16만여 어휘를 풀이까지 마쳐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었다. 일제는 이 원고에서 ‘조선’ ‘임진왜란’ ‘무궁화’ 같은 우리 민족성을 드러내는 말의 설명을 놓고 꼬투리를 잡았다. 또 ‘경성’은 풀이가 긴데 ‘동경’은 왜 짧으냐 등을 따지며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핍박했다.(‘우리시대의 언어게임’, 고길섶)
광복을 맞아 편찬작업 재개에 나선 조선어학회는 또 다른 시련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그동안 모아뒀던 사전 원고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 증거물로 압수돼 이리저리 이송되는 과정에서 분실한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1945년 9월 서울역 화물창고 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원고뭉치를 찾았다. 이를 토대로 하고 일부 자료를 보완해 1947년 한글날을 맞아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이어 해를 거듭하며 제2권(이때부터 ‘큰사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제3권이 순차적으로 나왔으나 6·25가 터지면서 큰사전 편찬은 또다시 기약없는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가난하던 시절…미국 도움으로 완간
조선어학회에서 이름을 바꾼 한글학회는 휴전협정 뒤 사전편찬 재개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정부의 ‘한글 간소화안’이 발목을 잡았다. 이것은 그동안 써오던 맞춤법을 버리고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는 게 핵심이었다. 가령 ‘꽃나무’를 ‘꼰나무’로 적는 식이었다. 한글학회로서는 이미 출간한 1~3권을 비롯해 나머지 원고를 모두 바꿔야 할 판이었으니 기가 막히는 상황이었다. 훗날 ‘한글파동’으로 명명된 이 사태는 거센 국민적 논란과 저항 끝에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포기 담화 발표로 가라앉았다. 이후 한글학회는 사전 편찬 마무리에 박차를 가해 1957년 제4, 5권을 잇달아 낸 뒤 그해 한글날에 제6권을 펴냄으로써 비로소 큰사전 완간을 보았다.
‘겨레의 얼을 세우고 민족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큰사전이 경비가 없어 미국 도움으로 빛을 봤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미 록펠러재단은 8·15 광복 뒤 한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한글학회의 사업을 선택해 지원했다.
당시 한글학회 이사장이던 최현배 선생은 완간본 발간사에서 록펠러재단이 최대 원조자였다고 밝혔다. 큰사전은 이후 1991년 내용을 깁고 더한 뒤 ‘우리말 큰사전’으로 재탄생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