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대혁명 진행 과정
문화대혁명은 한마디로 중국 역사를 후퇴시킨 ‘극좌 사회주의 운동’이다. 문화대혁명으로 움트려던 자본주의 싹이 짓밟히고, 인권은 무참히 유린됐다.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붕괴되고,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문화대혁명은 권력 투쟁과 개인숭배가 낳은 중국 역사의 아픈 과거다. 문화대혁명의 전개과정을 요약한다.
실패로 끝난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은 마오쩌둥 주도로 추진된 이른바 ‘대약진운동’과 연결된다. 대약진운동은 1958년부터 1960년 초 사이에 일어난 노동력 집중화를 통한 경제성장정책이다. 마오쩌둥은 ‘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철강 등 노동력 집중산업 부흥을 독려하는 경제부흥운동을 추진한다. 내부적으로는 ‘7년 내 영국을, 8년 혹은 10년 내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공업생산 지표를 크게 높였다. 이를 위해 농촌에서 과도한 인력을 강제로 착출해 도시로 유입시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노동력을 잃은 농촌의 농업생산력이 급속히 저하되고,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도시는 생필품 부족으로 몸살을 앓았다.
연이은 자연재해로 흉작이 겹치고, 옛 소련과의 관계까지 악화되면서 수천만명의 아사자가 생겼다. 결국 기술 개발을 병행하지 않고 노동력 집중만으로 무리하게 추진한 중화학공업 진흥은 처음의 기대치에 훨씬 못 미쳤고, 대약진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3년여에 걸친 대약진운동은 중국을 발전시키기보다는 농·경공업의 퇴보와 중화학공업의 과다발전이라는 기형적 결과를 낳으며 중국의 경제·문화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직을 사임한다.
문화대혁명 앞장선 ‘홍위대’
대약진운동 실패 후 중국 공산당 내부에선 노선갈등이 불거졌다.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대중노선을 주도하고, 류사오치·덩샤오핑을 선두로 한 실용주의자들은 공업 및 분야별 전문가를 우선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민생경제 회복을 위해 일부 자본주의 정책을 채택한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실용주의자들이 실세로 부상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세력과 자본주의 타파를 외치며 이를 위해 청년이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62년 9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사회주의에 자본주의를 접목한 수정주의를 비판하면서 반대파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에 나섰다. 마오쩌둥의 지시로 중·고·대학생을 주축으로 결성된 홍위병은 전국을 휩쓸며 마오 반대파들을 비판대에 세웠다. 1966년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마오쩌둥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함으로써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이 본격화된다.
홍위병들은 전국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찬양하고 전통적 유교문화를 거부하는 시위를 벌인다. 학교를 폐쇄하고 당 관료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실용파들이 장악한 권력을 무력을 탈취했다. 문화대혁명으로 실각되거나 숙청된 숫자는 300만명에 달한다. 문화대혁명은 1969년 4월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마오의 절대적 권력이 확립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에게 충성한 군부 지도자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인민 사이에서 문화대혁명이 마오쩌둥 개인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3년 덩샤오핑이 권력에 복귀하면서 문화대혁명은 곳곳에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문화대혁명도 막을 내린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
이데올로기, 계급투쟁, 평등주의, 외세배격을 선동한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를 상당히 후퇴시켰다. 말년에 마오쩌둥은 실용주의 노선을 절충한 후계자를 물색했으나 실패했다. 1981년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은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했다. 혹자는 문화대혁명을 만민평등의 위대한 역사적 실험이라고 하지만 인권을 유린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경제를 후퇴시킨 ‘암흑의 역사’라는 게 대다수의 평가다.
마오쩌둥 사망 뒤 중국의 지도자에 오른 개혁주의자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으로 후퇴한 중국의 역사를 진보쪽으로 되돌려놨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공산주의에 자본주의를 접목시켰다. 경제에는 자본주의를 수용하고, 정치에는 기존의 공산주의를 유지했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중국 인민을 잘살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엔 그의 실용정신이 배어 있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문화대혁명은 한마디로 중국 역사를 후퇴시킨 ‘극좌 사회주의 운동’이다. 문화대혁명으로 움트려던 자본주의 싹이 짓밟히고, 인권은 무참히 유린됐다.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붕괴되고,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문화대혁명은 권력 투쟁과 개인숭배가 낳은 중국 역사의 아픈 과거다. 문화대혁명의 전개과정을 요약한다.
실패로 끝난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은 마오쩌둥 주도로 추진된 이른바 ‘대약진운동’과 연결된다. 대약진운동은 1958년부터 1960년 초 사이에 일어난 노동력 집중화를 통한 경제성장정책이다. 마오쩌둥은 ‘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철강 등 노동력 집중산업 부흥을 독려하는 경제부흥운동을 추진한다. 내부적으로는 ‘7년 내 영국을, 8년 혹은 10년 내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공업생산 지표를 크게 높였다. 이를 위해 농촌에서 과도한 인력을 강제로 착출해 도시로 유입시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노동력을 잃은 농촌의 농업생산력이 급속히 저하되고,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도시는 생필품 부족으로 몸살을 앓았다.
연이은 자연재해로 흉작이 겹치고, 옛 소련과의 관계까지 악화되면서 수천만명의 아사자가 생겼다. 결국 기술 개발을 병행하지 않고 노동력 집중만으로 무리하게 추진한 중화학공업 진흥은 처음의 기대치에 훨씬 못 미쳤고, 대약진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3년여에 걸친 대약진운동은 중국을 발전시키기보다는 농·경공업의 퇴보와 중화학공업의 과다발전이라는 기형적 결과를 낳으며 중국의 경제·문화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직을 사임한다.
문화대혁명 앞장선 ‘홍위대’
대약진운동 실패 후 중국 공산당 내부에선 노선갈등이 불거졌다.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대중노선을 주도하고, 류사오치·덩샤오핑을 선두로 한 실용주의자들은 공업 및 분야별 전문가를 우선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민생경제 회복을 위해 일부 자본주의 정책을 채택한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실용주의자들이 실세로 부상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세력과 자본주의 타파를 외치며 이를 위해 청년이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62년 9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사회주의에 자본주의를 접목한 수정주의를 비판하면서 반대파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에 나섰다. 마오쩌둥의 지시로 중·고·대학생을 주축으로 결성된 홍위병은 전국을 휩쓸며 마오 반대파들을 비판대에 세웠다. 1966년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마오쩌둥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함으로써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이 본격화된다.
홍위병들은 전국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찬양하고 전통적 유교문화를 거부하는 시위를 벌인다. 학교를 폐쇄하고 당 관료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실용파들이 장악한 권력을 무력을 탈취했다. 문화대혁명으로 실각되거나 숙청된 숫자는 300만명에 달한다. 문화대혁명은 1969년 4월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마오의 절대적 권력이 확립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에게 충성한 군부 지도자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인민 사이에서 문화대혁명이 마오쩌둥 개인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3년 덩샤오핑이 권력에 복귀하면서 문화대혁명은 곳곳에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문화대혁명도 막을 내린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
이데올로기, 계급투쟁, 평등주의, 외세배격을 선동한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를 상당히 후퇴시켰다. 말년에 마오쩌둥은 실용주의 노선을 절충한 후계자를 물색했으나 실패했다. 1981년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은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했다. 혹자는 문화대혁명을 만민평등의 위대한 역사적 실험이라고 하지만 인권을 유린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경제를 후퇴시킨 ‘암흑의 역사’라는 게 대다수의 평가다.
마오쩌둥 사망 뒤 중국의 지도자에 오른 개혁주의자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으로 후퇴한 중국의 역사를 진보쪽으로 되돌려놨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공산주의에 자본주의를 접목시켰다. 경제에는 자본주의를 수용하고, 정치에는 기존의 공산주의를 유지했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중국 인민을 잘살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엔 그의 실용정신이 배어 있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