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돌아보면 오직 좋아진 것밖에 없는 지금, 미래를 내다볼 때는 오직 나빠지기만 할 것으로 예상해야 한다니, 도대체 무슨 그런 신념이 있는가.” 19세기 지성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1800~1859)는 ‘사회에 관한 대화’(로버트 사우디)를 읽고 이렇게 썼다. 산업혁명기 공장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를 보며 우울해했던 당대 식자층을 매콜리는 이 한마디로 꾸짖었다. 런던 공기가 더러워지긴 했지만, 절대빈곤에 허덕였던 과거 어느 때보다 좋다는 것을 매콜리는 직관으로 알았다. 새롭게 등장한 공장과 기계, 기술은 이전 시대에 없던 생산성과 소득, 일자리를 주었고 인구와 수명을 늘렸다는 점을 그는 간파했다. 인간의 기술성향(technophilia)으로 볼 때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이란 그의 예측은 탁견(卓見)이었다.
미래는 나빠지기만 한다?
매콜리가 그렇게도 ‘이성적 낙관주의’를 강조했지만, 미래가 암울하다는 기술공포(technophobia)는 20세기와 21세기에도 반복됐다. “인류는 기술문명 탓에 석유가 고갈된다” “이산화탄소로 지구가 망한다”는 공포는 20세기에 극에 달했다. 물론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증명됐다.
최근 나타난 인공지능(AI) 공포도 같은 맥락이다. 구글의 알파고가 바둑대결에서 이세돌 9단을 연거푸 이기자 “기계가 인간을 이겼다” “기계가 무섭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공포 시리즈가 이어졌다. 인공지능이 인간 기술의 산물임에도 주어는 인공지능으로 변했다.
이 같은 공포는 전례가 있다. 방적기가 섬유산업 일자리를 없앤다며 기계를 부수고 다녔던 영국의 ‘러다이트 미신’이 그것이다. 러다이트 추종자들은 더 많은 방적기가 더 많은 공장과 더 좋은 일자리를 낳는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기계=반(反)인간, 반(反)문명’이라는 지력으로는 알 턱이 없었다. 우리는 이제 더 많은 방적기가 대량생산과 대량고용을 이뤘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오자 다시 오류는 반복됐다. 인공지능은 더 많고, 더 좋은 일자리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란 인식을 언제쯤 갖게 될까?
반(反)기술은 원시 사고방식
기계와 기술을 반(反)문명적으로 보는 시각은 실은 자본주의를 죄악시하는 좌파적 프레임이다. 카를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은 반(反)자본주의를 기치로 모든 문명을 바라보고 재단한다. 자본주의를 오로지 기계문명과 동일시하고, 기계문명을 반인간화, 반문명화와 연결짓는 버릇이다. 그 어떤 체제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문화, 예술, 철학, 출판, 도덕, 질서, 과학이 더 번성했다는 것은 증명된 사실이다.
좌편향 시각에는 자연숭배주의가 깔려 있다. 그들은 자연을 손끝만큼도 건드려선 안 되는 성물로 여기며 ‘아바타’를 숭배한다. ‘원시상태가 더 좋았다’거나, ‘원시사회 이후의 모든 발달은 종의 쇠락을 향한 단계였다’는 장 자크 루소(1712~1778)의 우울증은 좌파 문명론의 교본이다. 이들의 세계관에서 자본주의 기술문명은 인간을 원자화하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악마로 보일 뿐이다.
이들은 자동차를 마부와 지게꾼들의 일자리를 없앤 괴물로 본다. 자동차 산업의 태동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원시 지향적이었다. 버스카드는 버스안내양을 쫓아낸 마귀로 그려진다. 컴퓨터는 타자수를 날려버린 괴수가 된다. 마부가 있고, 버스안내양이 있고 타자수가 있는 사회는 생산성이 낮아 가난에 허덕이던 과거 사회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이런 업종은 사라졌고 더 나은 일자리로 대체됐다. 생산성의 증가는 여가시간을 늘려주었다. 새로운 기술은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대체한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기술·과학 발전한 사회…도덕심도 높아
기술과 과학이 발전한 문명사회가 잘사는 이유는 지식의 짝짓기가 활발하고 그 결과물의 교환이 왕성한 덕분이다. 철로를 만드는 기술은 기관차를 만드는 기술과 만나 철도산업을 낳았다. 지식의 짝짓기다. 인공지능이라는 기술도 그동안 인류가 교환한 수많은 기술과 문화 짝짓기의 결과일 뿐이다. 생명진화처럼 오랜 기간 서서히 누적되고 교환되고 전문화한 결과다. 인류가 두어야 할 한 수순일 뿐이다. 서대문을 달리는 열차를 보고 악마라고 생각하거나, 라디오 속에 많은 난쟁이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던 문명의 후진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심지어 그것을 자본주의를 악마화하는 도구로 악용하기도 한다.
인간은 기술본능을 억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도 없다. 50만~60만 년 전 어떤 ‘원시 스티브 잡스’가 주먹도끼라는 최첨단 기술을 개발했을 때나, 허사비스가 알파고를 개발한 때나 인간의 기술본능은 유전자와 큰 뇌 속에 들어 있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미래는 나빠지기만 한다?
매콜리가 그렇게도 ‘이성적 낙관주의’를 강조했지만, 미래가 암울하다는 기술공포(technophobia)는 20세기와 21세기에도 반복됐다. “인류는 기술문명 탓에 석유가 고갈된다” “이산화탄소로 지구가 망한다”는 공포는 20세기에 극에 달했다. 물론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증명됐다.
최근 나타난 인공지능(AI) 공포도 같은 맥락이다. 구글의 알파고가 바둑대결에서 이세돌 9단을 연거푸 이기자 “기계가 인간을 이겼다” “기계가 무섭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공포 시리즈가 이어졌다. 인공지능이 인간 기술의 산물임에도 주어는 인공지능으로 변했다.
이 같은 공포는 전례가 있다. 방적기가 섬유산업 일자리를 없앤다며 기계를 부수고 다녔던 영국의 ‘러다이트 미신’이 그것이다. 러다이트 추종자들은 더 많은 방적기가 더 많은 공장과 더 좋은 일자리를 낳는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기계=반(反)인간, 반(反)문명’이라는 지력으로는 알 턱이 없었다. 우리는 이제 더 많은 방적기가 대량생산과 대량고용을 이뤘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오자 다시 오류는 반복됐다. 인공지능은 더 많고, 더 좋은 일자리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란 인식을 언제쯤 갖게 될까?
반(反)기술은 원시 사고방식
기계와 기술을 반(反)문명적으로 보는 시각은 실은 자본주의를 죄악시하는 좌파적 프레임이다. 카를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은 반(反)자본주의를 기치로 모든 문명을 바라보고 재단한다. 자본주의를 오로지 기계문명과 동일시하고, 기계문명을 반인간화, 반문명화와 연결짓는 버릇이다. 그 어떤 체제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문화, 예술, 철학, 출판, 도덕, 질서, 과학이 더 번성했다는 것은 증명된 사실이다.
좌편향 시각에는 자연숭배주의가 깔려 있다. 그들은 자연을 손끝만큼도 건드려선 안 되는 성물로 여기며 ‘아바타’를 숭배한다. ‘원시상태가 더 좋았다’거나, ‘원시사회 이후의 모든 발달은 종의 쇠락을 향한 단계였다’는 장 자크 루소(1712~1778)의 우울증은 좌파 문명론의 교본이다. 이들의 세계관에서 자본주의 기술문명은 인간을 원자화하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악마로 보일 뿐이다.
이들은 자동차를 마부와 지게꾼들의 일자리를 없앤 괴물로 본다. 자동차 산업의 태동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원시 지향적이었다. 버스카드는 버스안내양을 쫓아낸 마귀로 그려진다. 컴퓨터는 타자수를 날려버린 괴수가 된다. 마부가 있고, 버스안내양이 있고 타자수가 있는 사회는 생산성이 낮아 가난에 허덕이던 과거 사회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이런 업종은 사라졌고 더 나은 일자리로 대체됐다. 생산성의 증가는 여가시간을 늘려주었다. 새로운 기술은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대체한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기술·과학 발전한 사회…도덕심도 높아
기술과 과학이 발전한 문명사회가 잘사는 이유는 지식의 짝짓기가 활발하고 그 결과물의 교환이 왕성한 덕분이다. 철로를 만드는 기술은 기관차를 만드는 기술과 만나 철도산업을 낳았다. 지식의 짝짓기다. 인공지능이라는 기술도 그동안 인류가 교환한 수많은 기술과 문화 짝짓기의 결과일 뿐이다. 생명진화처럼 오랜 기간 서서히 누적되고 교환되고 전문화한 결과다. 인류가 두어야 할 한 수순일 뿐이다. 서대문을 달리는 열차를 보고 악마라고 생각하거나, 라디오 속에 많은 난쟁이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던 문명의 후진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심지어 그것을 자본주의를 악마화하는 도구로 악용하기도 한다.
인간은 기술본능을 억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도 없다. 50만~60만 년 전 어떤 ‘원시 스티브 잡스’가 주먹도끼라는 최첨단 기술을 개발했을 때나, 허사비스가 알파고를 개발한 때나 인간의 기술본능은 유전자와 큰 뇌 속에 들어 있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