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 정주영 탄생 100년
아산 정주영의 전설
1971년 9월 영국 런던. 56세의 정주영은 영국의 유명한 조선회사 A&P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나고 있었다. 가난한 나라의 정주영은 영국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가 도와주지 않으면 영국에서 돈을 빌릴 수 없었다. 그가 돈을 빌려 하려는 사업은 조선소 건설이었다. 롱바톰 회장은 기술력도 없고, 빚을 갚을 능력도 없는 나라에서 온 정주영에게 호의적일 수 없었다.아산 정주영의 전설
전설①…거북선 기적
“한국 정부가 빚보증을 서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롱바톰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승부사 정주영은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거기엔 거북선이 그려져 있었다.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철갑선을 제작했고 전쟁에서 일본을 물리쳤습니다.” 지폐는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을 알고 있던 롱바톰 회장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대단한 역사와 두뇌를 가진 나라입니다. 우리 현대도 자금만 확보되면 조선소와 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바클레이즈은행을 설득해주십시오.” 정주영의 500짜리 지폐는 그를 움직였고 바클레이즈행 표를 얻어냈다.
전설②…봉이 정선달
완공된 조선소도 없는데 선박 물량을 수주한 스토리는 재미있다. 바클레이즈은행에 찾아간 정주영은 두 번째 난관을 만났다. 조선소도 없고 물량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돈을 빌려주느냐는 게 은행 측 얘기였다. 특히 조선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배도 만들 수 있다는 정주영의 말에 혀를 찼다. “조선소를 지으면서 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도크(선박을 건조할 때 항만에 세우는 시설)를 짓기 전에 다른 작업을 하고, 도크가 완공되면 그때 다른 일을 하면 됩니다.” 바클레이즈은행은 정주영의 매력에 넘어가고 말았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배를 주문받아 오면 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정주영은 그리스에서 기회를 잡았다.
당시 40대의 그리스 선박왕은 정주영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정주영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도박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26t급 배를 두 척이나 주문했다. 계약금은 14억원.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이 5000~6000원 정도 할 때였다. 정주영은 약속한 기간인 5년 반보다 일찍 배를 만들어 주었다. 전설③…자동차
다음 전설은 자동차산업에서 나왔다. 1974년 7월 정주영은 자동차 공장을 짓기로 마음 먹었다. 1년에 무려 5만6000대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었다. 조선소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 도박이었다. 이전에 자동차 6대를 조립해보긴 했지만 그렇게 많은 물량을 만들 능력이 있을까. 모두가 “미쳤다”고 했다. 당시 국내에서 판매되는 자동차 수가 1000대 정도였으니 주위의 우려가 무리는 아니었다. 정주영의 생각은 달랐다. “수출하면 된다”였다. 주변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일본 자동차 조립회사의 방해도 많았다. 무리한 계획이었지만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는 것이 정주영식이었다. 1974년 현대는 ‘포니’를 이탈리아 자동차쇼에 선보였다. 90%가 자체 부품이었다. 1976년부터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 지금의 현대자동차는 이렇게 탄생했다.
전설④…주베일 공사
1975년 정주영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베일에 지상 최대 공사를 발주한다는 정보를 접했다. 석유 수출항을 건설하는 공사였다. 공사금액은 9억3100만달러. 당시 한국 1년 예산의 50%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돌, 콘크리트, 철구조물이 어마어마하게 필요한 사업이었다. 무더운 사막지역에서 일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정주영은 밀어붙였다. 한 개 남은 티켓을 기어코 따냈다. 입찰보증금 2000만달러도 없었지만 사우디 상업은행의 지급보증을 받아냈다. 수주액도 10억달러 이하는 안 된다는 참모들의 의견을 누르고 9억3114만달러를 써냈다. 10층 건물만한 철골 구조물 89개를 제작해 울산에서 주베일까지 바지선으로 싣고 가는 승부수를 띄웠다. 거리가 1만2000㎞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전설⑤…서산간척지 공사
구불구발한 서산간척지를 메워 땅을 만드는 공사가 1979년 시작됐다. 정부가 할 일이었지만 수지타산이 안 맞아 어떤 기업도 나서지 않았다. 정주영은 해외에 있는 건설장비도 쓸 겸, 해외 근로자에게 일자리도 줄 겸 해서 나섰다. 방조제 6500m를 지어 물을 막아야 했다. 마지막 남은 270m가 문제였다. 초속 8m의 급류가 흘러 메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돌을 부어도 쓸려 내려갔다. 정주영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폭 45m, 높이 27m, 길이 322m짜리 고철 배를 가라앉혀 급물살을 막는 이른바 ‘정주영 공법’을 썼다. 1988년 서산간척지는 옥토로 변했다.하지만 학교에선 정주영을 가르치지 않는다. 정주영 탄생 100주년에 되돌아 본 기업가 정신이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