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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을 읽으면 성공이 보인다"

    성공한 사람 중에는 ‘신문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신문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지식을 쌓고, 상상을 키우고, 경영 노하우를 터득했다고 말한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며 세계 최고 갑부 수위를 다투는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은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는 것은 신문에서 배우라”고 조언한다. 신문을 읽으면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게 되면 어느 시점에 진짜 관심을 끄는 것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버핏 회장은 하루 5~6개 신문을 꼼꼼히 챙겨 읽는다.《제3의 물결》 《권력 이동》 등을 쓴 미국의 세계적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도 대표적 ‘신문 마니아’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전 세계에서 배달되는 7개 신문을 손톱이 새까맣게 될 정도로 읽는다”고 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남다른 혜안의 원천이 바로 신문임을 인정한 셈이다. 《개미》 《나무》 등을 쓴 세계적 초베스트셀러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신문은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했다. 그는 ‘무궁한 상상력의 원천이 무엇이냐’는 기자 질문에 “내 상상력의 대부분은 신문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답했다. 그는 “신문에는 세상이야기, 사람이야기, 경영이야기, 문학이야기 등 모든 게 담겨 있다”고 했다.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고(故) 정주영 현대 회장은 신문으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거대기업을 일궜다. “나는 신문대학을 나왔다”는 정 회장의 농담 섞인 말은 신문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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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오래된 기업 두산 '새 출발'

    두산(斗山)그룹은 우리나라 기업 중 가장 오래됐다. 1896년 창업주 이름을 딴 ‘박승직 상점’이 뿌리다. 120년을 이어왔다. 왼쪽사진은 1934년 서울 광장시장 시절의 상점 모습이다. 옷감인 광목과 박가분이라는 화장품을 팔았다. 가운데 초립을 쓴 분이 바로 박승직 창업주(1864~1950)다. 18세 때 보부상으로 장사를 시작한 그는 한양 애오개에서 해남 군청까지 걸어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두산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제 그의 증손자인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 취임했다. “또 다른 100년의 성장을 이뤄 나가겠다.” 두산이 요즘 세계 건설과 기계시장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깔끔한 역전타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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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영·이병철·이수만·록펠러·잡스…위험 감수하며 시장 개척한 기업가들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기업과 기업가를 제대로 서술한 내용이 없다. 국부(國富)와 일자리를 창출해내는 주인공이 바로 기업과 기업가이지만 교과서의 홀대는 심하다. 기업인을 영웅처럼 소개하는 미국과 일본 교과서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적절한 교육의 부재(不在)는 기업과 기업가를 질투와 시기의 대상으로 적대시하는 집단 무지로 나타난다. 기업과 기업가가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지금 우리가 즐기는 거의 모든 문명의 이기(利器)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업가가 세상을 어떻게 바꿨는지를 알아보자.정주영…무에서 유를 창조1934년 쌀 배달을 시작한 청년 정주영은 조선소를 짓고 자동차를 만들어냈다. 아무 것도 없는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 결국 조선소를 지었고, 자동차 기술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라에서 이것저것 두드려 자동차 산업을 키워냈다. 세계 기업사에도 드문 정주영이지만, 학생들이 읽는 교과서엔 ‘소떼를 몰고 방북한 정치인’ 비슷하게만 그려져 있다.기술력과 자금력도 전혀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대형 선박 조선소를 만드시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인물이 정주영이었다. 돈을 빌리기 위해 영국과 그리스를 돌아다닌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내밀며 ‘우리는 16세기에 이런 철갑선을 만들었다’고 설득했다.“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다. 의심하면 의심하는 만큼 밖에는 못한다.” 조선소를 세우고, 자동차 산업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정주영과 현대그룹이 만들어낸 국부와 일자리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 위에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들은 일했고 임금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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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영 탄생 100년…"이봐, 해봤어?"

    지난 25일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1915~2001)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때를 맞춰 신문과 방송은 ‘한국 재계의 영웅’ 정주영을 조명하는 기사를 많이 내보냈다. 대한민국을 둘러싼 국내외 경제 여건이 심상치 않은 시점이어서 ‘기업가 정주영 탄생 100년’의 의미는 더 컸다.우리나라 학생들은 정주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미국과 일본 역사교과서는 경제성장을 주도한 기업과 기업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미국 교과서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와 석유혁명가 존 록펠러, 금융인 존 피어폰 모건을 큰 사진과 함께 자세히 소개한다. 최근 인물인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생존 인물인 빌 게이츠 전(前) 마이크로소프트 회장도 나온다. 일본 교과서도 미쓰이, 미쓰비시 등 일본 대표기업을 상세히 기술한다.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무에서 유를 일군 영웅들의 이야기를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근현대사 역사교과서 한 모퉁이에 정주영에 관한 서술이 있긴 하다. 건설, 조선,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경제인이 아니라,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카네기나 록펠러에 못지않은 ‘영웅’이 많은데도 우리 교과서에는 없다.정주영 할아버지는 현대그룹을 일으킨 창업주 이상으로 기억된다. 그를 ‘1세대 벤처사업가’ ‘불가능에 도전한 기업가’ ‘애국 기업가’로 표현하는 이유다. 그의 인생은 한국 경제발전과 맥을 같이한다. 기술과 자금도 없이 허허벌판에 조선소를 세우고 배를 만들어 수출한 일화는 유명하다. “잠 다 자고 어느 세월에 선진국을 따라 잡나”라는 불굴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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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슘페터: 기술혁신을 통한 창조적 파괴…드러커: 기회를 사업화 하는 모험정신

    아산(峨山) 정주영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다. 그는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란 학문적 용어를 정규교육으로 배운 적도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일생은 기업가 정신의 전형을 보여준다. 조지프 슘페터(1883~1951)와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인 피터 드러커(1909~2005)가 이론으로 기업가 정신을 세웠다면, 정주영은 몸으로, 행동으로 실천한 인물이다.기업가라는 용어는기업가라는 용어는 프랑스말에서 유래했다. 원래 뜻은 ‘시도하다’ ‘모험하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18세기 초 프랑스 경제학자 리샤르 캉티옹을 비롯해 프랑스 정치경제학자들이 처음 사용했다. 캉티옹은 상인이나 제조업자와 구분해서 이 말을 썼다. 위험 부담을 꺼리는 이들과 구분하기 위한 언어였다. 기업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시장에서 교환행위를 주도하고 이끄는 사람으로 캉티옹은 해석했다. 수요량과 공급량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이윤 기회를 쉼없이 찾아내는 사람이 기업가다. 여기에는 늘 이익과 손실이 동시에 도사리고 있다. 기업가는 시장을 바라보는 본능적 감각을 가져야 생존할 수 있다.슘페터가 본 기업가 정신슘페터는 기업가 정신을 학문적으로, 체계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학자로 평가받는다. 기업가 정신의 핵심은 혁신이다. 숨어있는 이윤을 찾아내기 위해 기업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한다. 그 바탕은 기술혁신이다. 이 기술은 현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깨뜨린다. 그가 말한 창조적 파괴는 바로 이것이다. 혁신과 창조적 파괴를 가져오는 정신, 그것이 기업가 정신이다.좀 더 학문적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신제품의 발명이나 개발, 새로운 생산방법을 도입하거나 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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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일 교과서는 카네기·록펠러 교육…한국교과서는 기업인 안 가르쳐

    현행 교과서는 노동운동을 한 전태일은 수없이 나오지만 산업화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기업과 기업인들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미국과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경제 성장을 주도한 기업과 기업인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다. 미국 교과서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금융가 존 피어폰 모건, 석유재벌 존 록펠러,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등장한다. 일본 교과서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치 오사카방직 창업자에 대한 소개를 시작으로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주요 기업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고교 한국사교과서에 기술돼 있는 기업과 기업인의 모습을 살펴보면 온통 부정적인 이야기뿐이다. ‘귀속재산의 불하, 원조경제의 수혜 등을 바탕으로 재벌이라 불리는 독점자본이 성장했다’(지학사) ‘정부 주도의 성장 정책과 대규모 자본이 들어가는 중화학공업의 특성상 재벌에 각종 특혜가 주어졌으며, 이로 인해 정경유착의 문제가 발생했다’(천재교육)는 표현이 대표적이다.‘정부를 주축으로 한 성장 정책과 기업인의 노력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는 문구도 있지만 곧바로 정경유착, 특혜, 경제독점, 빈부격차 확대 등의 내용에 파묻혀 버린다. 기업인 실명이 그나마 언급된 것은 8종 교과서 중 5종에 언급된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유일하다. 그것도 경제성장과 관련한 단원이 아닌 남북관계를 다룬 ‘소떼 방북’과 관련해 나온다.장두원 한국경제신문 인턴기자(연세대 국어국문 2년) seigicha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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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봐, 해봤어?"…불가능에 도전한 기업가 정신 표본

    1971년 9월 영국 런던. 56세의 정주영은 영국의 유명한 조선회사 A&P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나고 있었다. 가난한 나라의 정주영은 영국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가 도와주지 않으면 영국에서 돈을 빌릴 수 없었다. 그가 돈을 빌려 하려는 사업은 조선소 건설이었다. 롱바톰 회장은 기술력도 없고, 빚을 갚을 능력도 없는 나라에서 온 정주영에게 호의적일 수 없었다.전설①…거북선 기적“한국 정부가 빚보증을 서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롱바톰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승부사 정주영은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거기엔 거북선이 그려져 있었다.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철갑선을 제작했고 전쟁에서 일본을 물리쳤습니다.” 지폐는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을 알고 있던 롱바톰 회장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대단한 역사와 두뇌를 가진 나라입니다. 우리 현대도 자금만 확보되면 조선소와 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바클레이즈은행을 설득해주십시오.” 정주영의 500짜리 지폐는 그를 움직였고 바클레이즈행 표를 얻어냈다.전설②…봉이 정선달완공된 조선소도 없는데 선박 물량을 수주한 스토리는 재미있다. 바클레이즈은행에 찾아간 정주영은 두 번째 난관을 만났다. 조선소도 없고 물량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돈을 빌려주느냐는 게 은행 측 얘기였다. 특히 조선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배도 만들 수 있다는 정주영의 말에 혀를 찼다. “조선소를 지으면서 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도크(선박을 건조할 때 항만에 세우는 시설)를 짓기 전에 다른 작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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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조 흙수저' 정주영…16세 때 고향을 떠나다

    아산(峨山) 정주영은 1915년 11월25일 강원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6남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산이 정식교육을 받은 것은 소학교 과정이 전부였다. 16세 때 아버지가 소를 팔고 받은 돈 70원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공사판 막노동, 쌀가게 점원 등을 전전했던 그는 도전과 노력으로 세계적 기업가가 됐다.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시작으로 중동 건설시장 진출, 조선소 건설, 자동차 독자 개발, 서울올림픽 유치 등은 그가 적극적으로 앞장서 일궈낸 결과물이다. 서울올림픽 당시 재정적자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외국 선수들의 숙소를 처음부터 일반 시민용 아파트로 지었고 대회가 끝난 뒤 시민을 대상으로 일반분양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기가 막힌 발상이었다.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으로 외국 투자자금을 유치했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독자 개발에 성공했다. 최근 청년들 사이에 ‘수저계급론’이 팽배하다. 얼마 전 한국경제신문 사설은 정주영 회장이야말로 ‘원조 흙수저’라고 표현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빈곤과 굶주림으로 허덕이던 나라에서 빈손으로 일어나 세계적인 기업군을 일궈냈다. 흙수저라고 좌절한 것이 아니라 그런 불행을 극복하고 금수저가 됐다. 금수저를 질투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1991년 10월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세상에 내놨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든다고 했던 아산이다. 이런 정신을 찾기 힘든 시대다.장두원 한국경제신문 인턴기자 (연세대 국어국문 2년) seigichang@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