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2014년부터 '전면시행'이라지만 부동산 매매·임대차 계약 등 실생활에선 옛 주소 '병행사용'
예산 4000억 쓰고 혼선만 불러
['길 잃은' 도로명주소] "동네 골목길 다 외워야" 머리 싸맨 물류업체
['길 잃은' 도로명주소] "동네 골목길 다 외워야" 머리 싸맨 물류업체
서울에 올 들어 첫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지난 12일 오후 구로동의 좁은 골목. A택배업체 소속 최영훈 기사(34)가 한 소포의 주소를 보더니 갑자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터넷쇼핑몰에서 보낸 소포 상자에 옛 지번 주소 대신 도로명 주소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씨는 스마트폰을 꺼내 모바일 인터넷포털에서 새 주소 대신 지번 주소를 찾았다. 지번 주소로 찾으니 30분 전에 들렀던 집 근처였다. 최씨는 어쩔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그는 이날 동행한 기자에게 “구로구에서만 8년 동안 택배기사로 일하면서 번지수만 알면 어느 곳인지 금방 알 수 있지만 도로명 주소는 여전히 생소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길 잃은' 도로명주소] "동네 골목길 다 외워야" 머리 싸맨 물류업체

○현장에선 옛 주소와 병행 사용

내년 1월1일부터 도로명 주소가 전면 시행되면서 가장 많이 불편을 호소하는 곳은 택배·쇼핑몰·음식점 등 배달 관련 업체들이다. A사에 따르면 도로명 주소로 주문이 들어오는 택배는 아직 전체 물품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회사 관계자는 “새 주소로 적힌 택배 물건은 일일이 옛 주소를 같이 붙여 배달한다”고 설명했다.

배달하는 택배기사들도 도로명 주소에 불편을 토로하고 있다. 대부분의 택배기사가 옛 주소에 익숙해져 도로 중심의 새 주소를 낯설어하고 있다. 택배기사 이모씨는 “새 주소는 길을 따라 건물 번호가 순서대로 돼 있어 옛 주소에 비해 편할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외워야 하는 길이 너무 많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택배기사들은 “구로동처럼 작은 골목길이 많은 지역에서는 새 주소로 건물을 찾다가 길을 헤매기 십상”이라고 입을 모았다. 택배 주문 고객이 새 주소를 잘못 적어 엉뚱한 곳으로 배달하는 사례도 최근 들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택배 등 배달 관련 업체들은 도로명 주소 시행에 따른 혼란을 막기 위해 옛 주소를 병행할 계획이다. 한 택배업체 관계자는 “옛 주소를 병행하면 물류 혼란은 막을 수 있겠지만 새 주소가 정착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도로명 주소가 도입되면 주소를 찾기 쉬워 물류 비용 감소로 인한 연간 3조4000억원의 경제효과가 발생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예산 4000억원 투입했는데

정부가 도로명 주소 도입을 추진한 건 17년 전인 1996년이다. 2007년 새 주소를 도입한다는 내용을 담은 ‘도로명주소법’이 제정·시행되면서 정부는 전국적으로 도로명판과 건물번호판 설치 작업에 나섰다. 1996년부터 소요된 도로명 주소 전체 사업 예산 3907억원 중 절반이 넘는 2270억원이 2007년 이후 쓰였다.

정부는 당초 지난해 1월부터 새 주소를 사용할 방침이었으나 2011년 관련법을 바꿔 2014년 1월로 2년 연장했다. 국민의 인지도가 낮고 사용률이 저조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주무 부처인 안전행정부는 도로명 주소 전면 시행에도 국민의 실생활에서 달라지는 점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송경주 안행부 주소정책과장은 “구청이나 법원 등 공공분야에서만 새 주소가 의무 도입된다”며 “새 주소 시행에 따라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고 밝혔다. 실제로 종전 지번 주소는 토지 관리를 위해 부동산 매매·임대차 계약서상에선 계속 사용하게 된다. 결국 도로명 주소 전면 시행에도 불구하고 지번 주소가 병행 사용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도로명 주소 정착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조명래 단국대 도시지역계획학과 교수는 “한국인의 지리 관념은 도로명 주소와 같은 선 개념이 아니라 지번 주소의 동·리와 같은 면의 개념으로 이뤄져 있다”며 “100년 동안 익숙한 옛 주소를 대신해 새 주소가 정착되기까지 적어도 10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도흠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는 “일제강점기 때 지번 주소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동과 마을을 중심으로 생활이 이뤄진 건 우리 국민의 오래된 역사”라고 주장했다.

강경민/홍선표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