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청와대 대변인

밤 11시 언론사 사장실 찾아가 물컵 깨뜨리는 소동도 불사
"하나님, 오늘도 제 혀를 주관해 주시옵소서"
[대변인의 세계] 입으로 표현하지만 온 몸 던져 일하는 자리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출범한 노태우정부부터 이명박정부까지 25년 동안 청와대 대변인은 21차례 교체됐다. 청와대 대변인의 평균 수명이 14개월에 불과한 셈이다. 최근 10년을 기준으로 하면 평균 임기는 10개월로 줄어든다. 겉은 화려해 보이고, 대통령보다 국민 앞에 더 자주 얼굴을 내비치지만 말 한마디 실수로 날아갈 수 있는 ‘파리목숨’ 같은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직 대변인들은 하나같이 “잘해야 본전인 자리”라고 말한다. 문장의 조사 하나에 뉘앙스가 달라져 대통령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때문에 매일 살얼음판을 걷듯이 극도로 정제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노련한 기자들의 유도질문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줘야 하는 부담도 크다.

이런 와중에서도 일부 대변인은 ‘명대변인’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김영삼정부의 윤여준 대변인, 김대중정부의 박지원·박선숙 대변인, 노무현정부의 윤태영 대변인 등이 그 주인공이다.

윤여준 전 대변인은 노태우정부의 이수정 대변인 이후 최장수 기록을 갖고 있다. 2년 반 이상을 청와대 공보수석 겸 대변인으로 지냈다. 그는 대통령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언론에 전달한 대변인으로 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연설문부터 비공식 회의의 지시사항까지 대통령 발언 원고를 준비한 당사자다.

박지원 전 대변인은 가장 공격적이자 ‘최고 실세 대변인’으로 평가받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고, 특유의 친화력으로 기자들과 소통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전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김 전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거의 매일 새벽 김 전 대통령의 자택을 방문했다. 신임을 얻은 다음에는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박 전 대변인 스스로가 “대변인은 대통령의 자동차 앞에 드러누워 항의할 정도의 충성심과 진실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정도다.

그의 공격성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청와대 대변인의 언론사 심야 난입 사건’이다. 박 전 대변인은 김대중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3월 한 중앙 언론사의 가판기사를 보고 전화로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오후 11시 저녁자리를 접은 채 사장실로 달려갔다. 사장, 부사장, 편집국장과 승강이를 벌이다 물컵이 깨지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정치권 관계자는 “그만큼 몸을 던져서 일했다는 의미”라고 했다.

김대중정부 시절 여성으로는 처음 청와대 대변인이 된 박선숙 전 민주당 의원은 워낙 신중하고 절제된 브리핑으로 정평이 나 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할지언정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윤태영 전 대변인은 노태우정부 이후 유일하게 청와대 대변인을 두 차례 맡은 인물이다. 노무현정부 두 번째 대변인을 맡던 중 2004년 7월 건강을 이유로 대변인 자리를 내려놓았지만, 2006년 8월 다시 대변인에 임명됐다. 대통령비서실 다면평가에서 1등을 할 정도로 동료와 후배들의 신뢰도 두터웠다.

노태우정부 때 청와대를 출입했던 한 원로기자는 “대통령의 의중을 속속들이 파악하면서 언론에 알려야 할 것이 뭔지, 때로는 국익을 위해 뭘 감춰야 하는지를 정확히 판단해 국민에게 필요한 정보를 정제된 언어로 전달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대대로 명대변인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중도 하차한 경우도 적지 않다. 말실수를 했다든지, 존재감이 없다든지, 권력투쟁에서 밀려났다든지 등이 이유다. 노무현정부 시절 S대변인은 말실수로 70일 만에 물러나기도 했다.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개시한 날 “전군에 경계령이 내려졌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북 정보감시태세인 ‘워치콘’을 한 단계 높였다고 답했다. 이에 기자들이 대북 전투준비태세인 ‘데프콘’이 아니냐고 되묻자 “군사나 작전에 관해 충분히 답변해드릴 수 없는 점 이해해 주시리라 본다”며 얼버무렸다.

S대변인의 브리핑 내용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이미 AP 등 주요 외신을 통해 타전된 뒤였다. 다음날 북한은 “노골적인 도전이며 참을 수 없는 적대행위”라고 비난하며 예정된 남북경제협력 회의가 취소되는 등 남북관계가 급속히 냉각됐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